▲12월 28일자 <중앙일보> 문창극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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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신문은 정작 제눈의 들보는 외면하면서 남한테는 반성을 강요하며 윽박지르기 일쑤다. 길길이 날뛰는 강요와 윽박의 앞줄에는 늘 정치 분야의 '대기자 문창극'과 '전문기자 김진'이 서 있다. 이날도 문창극 대기자는 북한 체제를 '악의 시스템'과 '악의 덫'으로 규정하고 '햇볕정책 실패를 선언하라'(28일, 문창극 칼럼)고 강요한다.
"힘의 뒷받침 없는 평화는 굴복이다. 햇볕정책은 평화를 구걸한 것이었다. 지금도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발로 악의 시스템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중략)…이제는 햇볕정책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 평화는 햇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지켜진다."'힘의 뒷받침 없는 평화는 굴복'이라는 흑백논리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햇볕정책은 평화를 구걸한 것'이라는 논리는 궤변이자 비약이다. '구걸'은 약자가 강자에게 청하는 것이지, 강자가 약자에게 청하는 것이 아니다. 햇볕정책의 본질은 강자(튼튼한 안보)의 평화다. 설령 백보 양보하더라도, '햇볕정책은 평화를 돈(대북지원)으로 산 것'이지 '구걸'한 것은 아니다.
힘의 우위를 통해서만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은 전쟁은 인간의 사악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세계질서와 평화는 외교와 힘에 의한 국가 간의 상호작용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공세적 현실주의 외교' 노선이다. 북한과 이라크 등을 '악의 축'(axis of evil)과 '불량국가'(rogue states)로 규정한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네오콘, 그리고 기독교 탈레반(근본주의자)을 떠올리게 한다.
설령 햇볕정책의 실패를 인정한들 문 기자의 강요와 윽박은 부질없는 허공에 삿대질이다. 아무리 칼럼을 구석구석 톺아도 누구더러 실패를 선언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햇볕정책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상징하는 표현이고 노무현 정부가 전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했음을 감안하면, 그의 실패 선언 강요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싸잡아 비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을 '부관참시'라도 하자는 것인가그런데 어쩌라는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반드시 만들겠다"고 공언한 때가 바로 3년 전 엊그제(28일)인 것을. 그런데 문창극 대기자는 그로부터 채 2년도 안되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뜬 것조차 잊을 만큼 '경도성 인지기억장애'를 안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하자는 것인가.
하기는 <중앙일보>가 참여정부 출범을 앞두고 뜬금없이 '예산 1% 대북지원'을 제안해 신선한 충격을 던진 때가 8년 전이고,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느닷없이 '통일세'를 주장한 지 한 달도 안되어 이 신문이 '예산 1% 통일기금 적립 실천할 때'라는 기획보도로 화답한 것이 불과 세 달 전이다. '경도성 인지기억장애'의 결과가 아니라면, '예산 1% 대북지원'은 단지 그때그때 다른 '정권 입 맞추기용'이었다는 것인가.
적어도 이런 선전선동 분야에서 '문창극 대기자'와 견주어 청출어람은 '김진 전문기자'다. 김진은 문 기자가 진보개혁 진영에 겨눈 재단의 칼날을 보수진영에까지 들이댄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칼럼(김진의 시시각각)에서
'김관진 국방은 혈서를 쓰라'(12월 6일)고 강요하더니, 이번에는
'김정일에 침묵하는 박근혜'(12월 27일)라는 칼럼에서 "박근혜는 김정일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지도자다"면서 김정일에게 '충격요법'을 주는 압박전선에 동참할 것을 박근혜에게 강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지도자가 있다. 박근혜 전 대표다. 자유민주체제와 국가안보에 관한 한 박근혜는 정통파다. 그는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좌파세력을 상대로 국가정체성 수호 투쟁을 이끌었다. 천안함에 대해선 정부의 단호한 조치를 촉구했고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강력히 규탄했다. 그러나 그는 '악행(惡行)의 근원' 김정일에 대해선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중앙>의 '전쟁불사 코드'는 조갑제의 '전쟁 예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