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가출한 첫날 저녁 나는 녀석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못했습니다.
송성영
사실 저는 녀석을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다. 녀석은 종종 작은 도서관에 찾아오는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천덕꾸러기 소리를 들어가며 담배까지 피운다고 합니다. 주변 아이들 말로는 장난이 심해서 그렇지 친구들 돈을 빼앗거나 괴롭히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부에는 관심 없다는 녀석에 대한 소문을 접할 무렵이었습니다.
"너 공부하기 싫지?""예, 싫어요.""아저씨두 너만할 때 담배 피우고 그랬다. 쌈박질만 하고 다니는 꼴통이었지, 공부하기가 죽어라 싫어서 부모님한티 무릎 꿇고 앉아 제발 좀 학교 그만 두게 해달라고 빌었던 적이 있었지."
녀석의 두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두 귀를 세웠습니다.
"그런디 우리 엄니가 울면서 애원하더라,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한다구, 그래서 그냥 다녔지 뭐, 근디 너두 공부가 그렇게 싫으냐?" "예.""다 싫어? 재밌는 과목이 하나쯤 있을 거 아녀?""체육요. 체육 시간이 젤 재밌어요.""체육 말고 다른 거 없어?""영어요.""그래? 그람 영어라도 열심히 해봐라, 아저씨는 말여, 공부하기 싫은데 책 읽는 게 재밌어서 수업시간마다 책상 밑에 소설책 같은 거 펼쳐 놓고 부지런히 읽었다. 너두 영어가 재밌지?""다른 과목보다는 재밌어요.""그럼 일단 영어만이라도 열심히 공부해봐. 그런디 말여, 담배 있잖어, 아저씨 생각에는 그거 피우는 게 나쁜 짓이라 볼 수 없지, 몸에 안 좋기 때문에 나쁜 거지. 사실 아저씨도 그게 잘 안 되는데 암튼 너는 어리기 때문에 몸에 더 좋지 않은께 피우지 않았으면 한다. 나중에 아저씨처럼 끊기 힘들어져." 대충 그런 말을 주고받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 것입니다. 문득 녀석이 생각나 우리집 작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00녀석 요즘 공부 좀 하냐?""어? 아, 얼마 전에 영어 시험을 봤는데 엄청 잘 봤어, A, B반이 있는데 A반에 속했어. 그리고 수업 시간에 책도 읽는 거 같어."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 줄 알았는데 녀석은 나름대로 새겨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 영어사전을 선물했는데 아직도 그 영어사전은 작은 도서관에 모셔져 있습니다. 녀석이 나처럼 건망증이 심한 모양입니다.
"불 끄고도 잠 안 와서 새벽 두시 넘어서 잤어요"녀석이 가출한 날 밤. 자정이 넘어서야 작은 도서관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녀석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핵발전소에 관련된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부스스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봤더니 옆방에서 한 녀석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00녀석이었습니다.
"어라? 이 눔 자식 봐라, 어디 아픈가? 근디 인효 엄마는 어딨는겨..."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와 보니 일손 부지런한 아내는 손수레를 끌고 집 근처 도로가에서 땔나무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이구 참, 그만두라니께 내가 한다니께 그러네, 근디 00녀석 학교 안 갔네?""죽어도 가기 싫대." "그렇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야지. 집에는?""하루 더 자고 내일 간다네."우리집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학교 가기가 죽도록 싫으면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동안 8년 이상 꼬박꼬박 학교 다녔고 앞으로 최소 몇 년을 더 다녀야 할 그놈의 학교인데 하루 이틀 빠진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실에 꿀단지를 감춰 놓은 것도 아니고, 죽도록 가기 싫은 학교에 가서 뭔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바에 차라리 집에서 할 일 없이 골치 아픈 생각 비워가며 빈둥거리는 게 훨씬 낫지요.
아침밥을 같이 먹으려고 늘어지게 잠든 녀석을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 조그만요, 조금만 더 잘 게요.."녀석이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담배까지 피운다는 녀석이었지만 이제 겨우 열다섯, 아직 어린애였습니다. 무엇이 이 어린 아이에게 담배를 피우게 했을까? 나는 녀석이 아무렇게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억압하는 학교, 그런 학교가 싫었던 내 청소년기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뒤에 알게 된 것인데 내 청소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큰 고통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