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예사> 1914 캔버스 위 종이에 유화 42.54 x 33.02 cm 올브라이트녹스아트갤러리, 버팔로, 뉴욕> ⓒMarc Chagall/ADAGP, Paris-SACK, Seoul, 2010 Chagall (R)
어찌 보면 샤갈은 모범생처럼 규칙적으로 살고 정치적인 사안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것을 자제하며 예술만의 고유 생태계를 지키려했나. 의외로 그의 작품에는 마티스와 마그리트와 달리 분노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 분노는 감정적으로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어둑하고 몽환적인 색채에 몽글하게 잠겨있다. 서커스 시리즈 <하얀 곡마사와 광대>(1965)가 그러하다. 친구였던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가 서커스 연작에서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의 비애에 성큼 다가갔다면 샤갈은 몇 발자국 벗어나 있다.
한편으론 이렇게 온건한 거리두기가 못마땅하기도 하고 샤갈이 더 일찍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체험했거나 더 늦게 태어났다면 그의 작품도 상당히 달라졌으리라는 상상도 해본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위대하지 않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는 없기에, 샤갈도 처참했던 시대와 세계를 조망하며 작품에 응축시켰어야 진정 위대한 예술가가 아닐까. 하지만 역사의 뒤편에서, 과거사를 속속들이 아는 유리한 입장에서 한 인물과 시대를 재단(裁斷)하고 거기다 역사적인 가정까지 삽입하는 것은 심각한 반칙행위 같다.
착각을 하나 했다. 기독교나 유대교에서는 펄쩍 뛰겠지만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뛰어날 수 있다. 어떤 인생을 살았건 특정한 시기에 가진 재능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면 창작자의 이름보다 더 오래가는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공적 인생은 별 볼일 없는 예술가도 후세를 경탄시킬 명작을 충분하리만치 빚어낼 수 있다.
<귀촉도>를 쓴 미당 서정주가 그러했고, <에덴의 동쪽>의 감독 엘리아 카잔(Elia Kazan, 1909~2003)도 그 선상에 있었다. 그들의 공적 인생은 참으로 비루했지만 그들의 작품은 후대까지 광채를 발하고 있기에. 그래서 샤갈의 작품을 정치적이거나 공적인 태도와 결부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고 그 자체로, 특히 유대인이나 시대상황과도 별개인 샤갈만의 세계관을 살펴야 하리라.
이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유대인들을 떠올리면 더욱 선명해진다. 러시아 혁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경험을 한 아인 랜드(Ayn Rand, 1905~1982)는 공산주의를 혐오한 나머지 <아틀라스(Atlas shrugged)>에서 평등주의의 폐해를 과대포장했고, 부패한 공리주의가 도래할 것 마냥 가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애처롭게 헛발질을 해댔다.
한나 아렌트는 외과의 같은 담담한 시선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함을 끄집어서 폭력의 일상성을 고발하며 인류 전체의 문제로 환기시켰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자 유대인이었던 트로츠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우리가 테러라고 일컫는 행위까지 포함해서)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이렇듯 동시대 동일한 사건을 겪더라도 이를 흡수하고 응전하는 방식은 제각기이다. 따라서 샤갈도 시대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이들처럼 자신만의 프리즘을 통해 반응했을 것이다. 그것이 뭘까. 어른어른 그 실체가 잡힐듯하면서 삼각형, 구형 등의 도형 형상을 슬쩍 지나가듯 애매하게 남긴 <산책>(1917~1918)처럼 뚜렷이 다가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