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반공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살고 만기 출옥하는 리영희 선생의 모습. <르몽드>는 당시 이 일을 전하면서 리영희 선생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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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고통 속에서도, 선생님은 따뜻한 마음과 우스갯소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의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놓으려고 곧잘 우스갯소리 하시면서 소년처럼 웃으셨지요. 그리고 선생님을 사랑하는 '8자매의 재롱'에는 수줍은 소년이 되어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의 이야기가 나오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성의 비판을, 불의에 대해 불덩이 같은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바로 '젊은 리영희'의 모습이었습니다. 1978년 가을 서대문구치소에서 뵈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1978년 10월 말. 저를 포함하여 동아투위(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언론인 모임) 위원 10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갇혔지요. 대학가의 데모, 노동계·종교계·지식인 사회의 저항운동을 그냥 사실만 모아서 일지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보다 1년 전쯤, 선생님의 저서인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가 반공법 위반이라 하여 구속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 가보니 선생님은 '4사 상(上) 30방'에 계셨고, 저는 '4사 상 15방'에 수감되어, 같은 사동에 있게 됐습니다. 당시 선생님과 제가 머물렀던 그 감방은 2층 구조로 다섯 개 동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한가운데 큰 복도가 길게 늘어 있었고, 그 옆으로 15개 방이 배치되어 있었지요.
선생님과 함께 머물게 된 '4사 상'에는 복도에서 선생님 쪽 방인 20방에 동아투위 홍종민 선배가 있었고, 6방에는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의 비서인 김옥두 선생이 들어와 있었습니다(얼마 뒤 그 방은 다시 수감된 동아투위 성유보 선배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선생님은 제 방 앞을 지나 1방 옆에 있는 세면장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조그만 창이 있는 방 앞에서 선생님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선생님은 제 방을 지나시면서 "정 형, 잘 주무셨소?" 그렇게 묻곤 하셨지요. 제 차례 세면 때가 되면 저희 사동 앞 '5사 하(下)'에 수감돼 있던 민족경제학자 박현채 선생님과 동아투위 이기중 선배에게 큰 소리로 아침 문안을 드렸지요.
그 때 서대문구치소를 비롯해 전국의 감옥소에는 정치범·사상범이 차고 넘쳤습니다. 서대문구치소에만도 동아투위 10명을 비롯해서 대학생 긴급조치 위반자가 수 십 명에 이르렀고, 김지하 시인도 장기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79년에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한명숙(전 국무총리), 신인령(전 이대총장), 황한식(부산대 교수), 김세균(서울대 교수), 장상환(경상대 교수), 이우재(전 국회의원) 선생 등이 또 우르르 잡혀 들어왔습니다.
감옥에 있던 그 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습니다. 온기라고는 찾을 길 없는 그 감방에서 추위를 심하게 타는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떨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웬 잠이 그렇게 쏟아지는지, 시간만 나면 밤이든 낮이든 잠을 잤지요. 선생님이 면회를 다녀오시면서 제 방 앞에 오셨을 때 거의 대부분 저는 잠에 떨어져 있어서, 선생님이 깨우시곤 하셨지요.
선생님의 검은 머리카락이 속절없이 복도 위로 떨어지다제 방 앞에는 담당 교도관이 사용하는 조그만 의자와 책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감방에서 글을 쓰는 일이 금지되어 있어서, 편지를 쓸 때 교도관 자리에서만 쓰게 했지요. 그리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 기결수가 되면 머리를 깎게 되는데 바로 머리 깎는 자리가 내 방 앞 교도관 의자였습니다.
그날, 79년 1월 몹시도 춥던 날, 교도관 의자에 선생님이 앉아계셨고, 그리고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깎이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상고 중이었던 선생님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던 것이지요. 선생님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속절없이 복도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에 치밀어 오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머리카락 깎이신 선생님은 바로 광주교도소로 이감하셨습니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인 79년 12월 초에 저는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선생님도 광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셨지요. 그 겨울 뒤 서울에는 봄이 오는 듯했습니다. 저는 박정희 시대가 끝났으니, 군부독재 체제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순진했지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이전 겨울에 있었던 12·12 쿠데타조차도 제대로 인식을 못 한 셈이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순진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동아투위 동지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서울 수유리 가톨릭 피정센터에 모여서 새벽까지 '새 시대, 새 언론'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밤새워 토론하던 바로 그 시각에 전두환 신군부는 민주 인사 대량 검거에 나섰습니다. 바로 80년 5월 18일 전야였습니다.
우리의 70, 80년대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선생님은 5월 17일 밤 11시께 잡혀가셨지요. 저의 집에도 12명의 계엄군이 자정에 들이닥쳤습니다. 저 뿐 아니라 여러 동아투위 선배들을 비롯하여 알만한 재야인사들 대부분이 그렇게 계엄군의 습격을 받았지요. 동아투위 동지들은 그날 밤 수유리에서 있었던 밤샘 토론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급보를 접한 검거 대상자들은 바로 수유리 뒷산으로 도망쳤고,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배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그 당시 잡혀가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집중적으로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1년 뒤 잡혀가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김대중 선생님으로부터 수 십만 원의 자금을 받아서 그 돈을 대학생 3명에게 전달했으며, 그렇게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엮어 놓았더군요. 3명의 대학생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계엄군에 잡혀가서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지, 나에게서 김대중 선생님 자금 수 십만 원을 받았다고 '자백'했고, 그런 '자백'이 담긴 진술서에 날인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의 70년대와 80년대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그 야만의 시대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던지고,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고, 일터를 빼앗기는 고난과 희생, 헌신 덕분에 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비로소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기적처럼 '새 시대, 새 언론'인 <한겨레신문>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던 그날, 선생님과 송건호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떨리는 손으로 창간호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1년 뒤 <한겨레신문> 창간 1주년 기념으로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는 창간 1년 뒤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어서 '발전기금' 명목으로 국민성금을 모금하고 있었습니다.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 구속 소식이 전해진 뒤 국민성금에 불길이 타오르면서 목표치를 훨씬 넘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글로써 뿐 아니라 이렇게 온몸으로 <한겨레신문>의 기둥이 되셨습니다.
저는 89년 여름부터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특파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종종 연락이 왔습니다. 대부분 제가 보도한 기사의 바탕이 되는 자료들, 그러니까 미국 의회 청문회 자료, 국방부 등 미국 정부의 주요 문건 등의 자료를 보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철저하게 자료를 챙기고, 그 자료를 근거로 객관적인 분석과 비판을 하셨지요. 선생님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이처럼 우리에게는 거울이었습니다.
리영희, 고은의 지극한 사랑과 우정91년에는 미국 미시간에서 한국학 세미나가 열려 취재를 갔지요. 마침 그 자리에 선생님과 고은 선생님도 오셔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선생님과 고은 선생님 사이를 보니 단순히 형님, 아우 하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아주 깊은 사랑과 우정, 존경이 어우러진 관계였습니다. '옆에서 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랬기에 선생님을 보내는 고은 선생님의 마음은 그만큼 더 절절했고, 그런 마음과 뜨거움이 선생님을 보내면서 쓰신 조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배 터지게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슬픕니다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그리도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그리도불의에 못 견디고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그것 못 견디는 사람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그 지식이 행여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윗니 아랫니못 견디는 사람그리도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허나 옥방에서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훌쩍훌쩍 울었던 사람죄수복 입고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1평 반짜리 독방에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시대가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또 시대가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맨 앞으로 외쳐댄 사람그런 어느날 밤지구 저쪽에서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아니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설거지를 하다가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아시아의 아픔조국의 아픔조국에 앞서사회의 아픔아니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껄껄 웃다가그 웃음 틈서리로아무래도아무래도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맛있는 사람속으로멋있는 사람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2000년 여름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 일을 끝내고 귀국하여, 선생님 뵙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러다 그 해 가을, 선생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오른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잃어버린 팔과 다리의 힘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 놀라운 의지로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산본 수리산을 쉬임없이 오르내리셨고, 많이 회복되어 그렇게 좋아하시는 자동차 여행도 다니시고, 심지어 경비행기도 타셨지요.
<대화>, <인물현대사> 그리고 KBS2005년 봄, 임헌영 선생님과 나누신 자전적 대담집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 출간되었고, 이를 기리는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KBS의 <인물현대사-리영희 편>을 연출한 양승동 피디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우리사회의 수구 기득권에서는 <인물현대사>가 좌편향된 프로그램이었다고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경직된 이념의 스펙트럼을 더 유연하게 넓혀야 된다고 평소 생각한 터여서, 그런 비판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KBS 조직의 자율이 크게 확대되어 기자와 피디들이 토론과 집단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 잘 만들어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대화> 출판 기념식에서 처음 만났던 양승동 피디는 그 뒤 2008년 8월 초, 제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강제로 해임당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의 공동대표를 맡게 된 인물입니다. '사원행동'은 수구적 성향의 KBS '옛 노조' 활동에 절망한 젊은 기자, 피디들이 이를 버리고 새로 만든 KBS '새 노조'의 바탕이 되었지요.
그런데 <인물현대사>를 가운데 두고, 두 인물이 참으로 기이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사원행동'의 주축이었고, 뒷날 KBS '새 노조'의 산파역을 한 양승동 피디는 <인물현대사-리영희 편>을 직접 제작했습니다. 2008년 '정연주 퇴진'에 올인한 당시 KBS 노조의 박승규 위원장(현 보도본부 사회부장)은 공식 인터뷰에서, 그리고 노사협의회 자리에서 서슴없이 <인물현대사>와 <미디어포커스>를 편파방송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했지요.
내게는 이 두 사람이 참으로 여러 면에서 너무나 뚜렷한 대조로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요즘 KBS 왜 저래?"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내 머릿속에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맨 먼저 떠오르곤 한답니다. 지난 봄, 선생님께서 KBS 돌아가는 이야기 물으셨을 때 이런 얘기 들려 드렸지요.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제가 강제 해임되기 전, 이명박 정권의 수하들인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등이 총출동하여 온갖 겁박을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한 자, 한 자, 정성으로 직접 써 보내 주신 그 편지는 제가 포악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조중동, KBS 노조의 연합작전에 끝까지 버티는 데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정연주의 증언1' 참조)
선생님은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정 사장 전화들이 연결이 안 돼서 이리로 보내오. 상황의 진전을 주시하면서 정 사장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리고 있소. 같은 전선에 섰던 전우와 동지들이 허약하게도 스스로 할 바를 다하지 않고, 백기를 들고 꼬리를 감고 물러나는 꼴들을 보면서 한탄밖에 없소. 정 사장 한 사람이라도, 민주주의 제도의 책임 있는 '공인'(公人)이 자신의 권리와 직무와 직책을 정정당당하게 수행하는 자세를 끝까지 보여주면 좋겠소. 지금 나는 정 사장의 모습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고 있는 느낌이오. 반 민주주의 집단의 폭력과 모략으로 꺾이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명예롭게 소임을 다 하시오. 그래서 민주주의에도 영웅이 있을 수 있다는 모범과 선례를 남기시오.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 선생님은 이 밖에도 저에게 종종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은 꼬불꼬불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저에게 뿐만이 아니라 좋은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그렇게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지요.
광주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