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피해자의 울분 "사법정의 사라졌다"

키코 관련 소송에서 중소기업 대거 패소... "법원, 중소기업 외면했다"

등록 2010.11.29 17:46수정 2010.11.29 17:46
0
원고료로 응원
 김원섭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장인 29일 오후 법원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이날 키코 관련 소송에서 은행의 손을 들어준 법원을 비판하고 있다.
김원섭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장인 29일 오후 법원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이날 키코 관련 소송에서 은행의 손을 들어준 법원을 비판하고 있다.선대식

"원고의 피고에 대한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29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32부 558호 법정. 서창원 재판관은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날 빼곡히 법정을 채웠던 60여 명의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모조리 다 기각할 수 있느냐", "고민한 흔적이 없다" 등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판결이 끝난 후 법정 바깥에서 만난 기자에게 "사법정의가 사라졌다, 금융기관 손만 들어줬다"고 울분을 토했고, 또 다른 관계자는 "2년 동안 여기에 매달려왔는데 허탈하다, 소송 비용도 다 날리게 생겼다"고 말했다.

이날 558호 법정을 포함해 서울중앙지법 4개 법정에서는 키코(KIKO) 상품으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 118곳이 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반환 소송 141건 가운데 91건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중 중소기업이 일부 승소한 19건을 제외한 72건은 기각당했다.

키코 상품은 환율이 일정 범위 내에서 변동할 경우 처음 계약한 환율에 따라 외화를 원화로 바꿀 수 있도록 한 환헤지(환율 변동 대비) 상품이다. 이 상품의 특징은 환율이 당초 설정해 둔 상·하한선 내에서 변동할 경우 중소기업은 이익을 얻지만, 변동폭이 극심할 경우 큰 손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은행의 공격적인 상품 판매로 2007년~2008년 많은 기업들이 이 상품에 가입했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환율이 요동치자, 기업의 손해가 커졌다. 금융 감독원에 따르면, 2010년 6월 현재 748개 기업이 키코 계약으로 인해 3조2247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72% 가량이 중소기업의 피해다. 

법원, 은행 손 들어줘... "키코는 불공정한 상품 아니다"


이날 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가장 쟁점이 됐던 키코 상품의 적합성에 대해 "키코 계약의 기본 구조는 구조적으로 불공정하거나 환헤지(환율 변동 대비)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법원은 또한 "수출기업들이 (환율의) 일정 구간에서는 당시 선물환율과 시장환율보다 더 높은 행사환율을 보장받을 수 있거나 환율상승에 따른 환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며 "사후 (극심한 환율 변동이라는) 시장상황의 변화만을 이유로, 계약상 책임을 부정한다면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와 민법의 대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은행이 키코 계약 과정에서 기업에 적합한 상품인지 검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법원은 은행이 고객 보호 의무를 져버렸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이날 언론 브리핑을 통해 "이날 선고는 통화옵션상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판단한 대규모 1심 본안 판결"이라며 "복잡한 파생금융상품과 관련해 금융기관의 고객보호의무를 재확인한 판결이자 규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키코 피해 중소기업 쪽 대리인인 김무겸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판결이 기대에 못 미쳤다, 은행의 과실을 인정할 줄 알았다"며 "법원이 중소기업 구제에 소극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올해 2월 키코 관련 첫 번째 판결에서 법원은 "은행이 얻는 이익이 다른 금융거래에서 얻는 것에 비해 과다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어, 키코와 관련해 은행에 유리한 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08년 9월 8일 오후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환헤지 피해대책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서 환 헤지를 위해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인 등 관계자들이 '키코아웃'이라고 쓴 종이카드를 들어보이며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2008년 9월 8일 오후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환헤지 피해대책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서 환 헤지를 위해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인 등 관계자들이 '키코아웃'이라고 쓴 종이카드를 들어보이며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회사 5년치 이익 사라졌고, 2년 간 소송에 매달렸는데..."

법원의 판결에 키코 피해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경기도 안산시에서 자동차 금형 제조업체인 티엘테크를 운영하는 안용준씨는 "사법정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했다.

안씨는 지난 2008년 9월 한국시티은행의 권유로 1년 계약기간의 엔화 키코 상품에 가입했다. 은행 쪽은 최대 3600만 원의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안씨를 꼬드겼다. 하지만 1년간 환율 상승으로 은행 쪽에 물어준 돈만 11억5천만 원에 달했다.

그는 한국시티은행이 부당이득을 얻었다고 소송을 냈지만, 이날 법원은 은행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날 법원 판결에 비춰보면, 안씨의 또 다른 키코 계약 부당이득금반환소송의 전망도 밝지 않다.

안씨는 "2건의 키코 계약으로 날린 돈만 모두 23억5천만 원으로, 회사의 5년 치 순이익금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신용등급이 떨어져 투자를 못하고 있어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2년 동안 회사일에 신경 못 쓰고 소송에 매달렸다, 법원의 판결은 키코 피해 중소기업들을 짓밟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원섭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장은 판결 이후 법원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법원이 1천여 개의 우량한 수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교묘한 속임수와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한 키코 장사로 배를 불린 거대 금융권력에 최소한의 진상을 규명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외면당했다"고 지적했다.

하재청 금성제지기계 사장은 "똑같은 사안을 두고 인도 정부와 재판부는 중소기업의 손을 들어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은행 편만 들고 있다"며 "재판부가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릴까지 끝까지 싸우겠다, 항소하겠다"고 전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정책실장은 "키코 상품의 적합성 여부에는 논란이 있다"면서도 "금융감독기관이 키코 상품에 대해 감독을 제대로 못한 점이나 중소기업이 은행과의 '갑을 관계'에서 키코 상품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할 수 없었던 점 등은 향후 재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키코 #키코 피해 #중소기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