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의 TNT 회사 앞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
조명신
사회적 대화의 모델국가로 알려진 네덜란드도 한때 지금 우리의 사회적 대화기구처럼 무기력증에 빠진 경험이 있다. 바세나르협약 이전의 사회적 대화는 그야말로 깊은 침체의 연속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상대방에게 책임 떠넘기기와 보여주기 식의 대화가 판을 쳤다. 노동재단과 사회경제위원회(SER)는 대화만 무성하고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함으로서 오히려 개혁을 지체시키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는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1982년의 바세나르 협약은 침체기의 무기력과 냉소를 일소하는 사회적 대화의 일대 혁신이었다. 빔 콕 당시 노총위원장은 대타협의 주역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됐다. 임금삭감과 근로시간 단축을 묶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타협안은 일방적인 노동시장유연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참신한 대안이었다. 이런 유형의 합의는 노사관계의 일대 혁신이었고, 고질적인 유럽의 고용위기에 대한 노동조합의 능동적인 대처였다.
네덜란드의 사회협약 모델은 1980년 대 후반에 이르러 아일랜드⋅이탈리아⋅스페인⋅호주로 확산되며 영⋅미식 신자유주의 개혁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두 모델은 구체적인 정책 내용보다 추진방식에서 달랐다. 세계화의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영미형은 노동조합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돌진형 개혁의 길을 갔다면, 네덜란드형은 노동조합을 개혁의 동반자로 끼고 가면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한다는 식이다.
OECD 모든 국가들이 1980년대 이후 성장과 고용창출을 위해 노동⋅복지개혁에 몰두했던 것은 다 마찬가지였다. 다만 네덜란드의 경우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동조합의 임금양보와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절충안을 만들었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서는 유연안전성(flexicurity) 정책이라는 타협안을 창안했던 것이 차이다.
깊은 불신과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사회적 대화기구가 일거에 네덜란드 경제기적의 일등 공신이자 세계의 대안모델로 떠오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경제위기와 고용위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노사정 리더십의 의기투합이 있었고, 의욕이 넘치는 젊은 총리와 노총위원장의 등장은 무엇인가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결단은 단순했다. 1982년의 대타협은 경총 회장과 빔콕 노총위원장이 경총 회장의 집 식탁에 마주 앉아 임금과 근로시간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 맺은 둘 간의 합의문은 반쪽 분량의 메모에 불과했다. 합의메모를 기초로 양 측의 협상팀이 구체 협약안을 다듬어가는 일은 절차에 불과했다. 반대파들이 바세나르협약을 '부엌에서 맺은 협약'(kitchen accord)이라고 조롱했지만 이것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에는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바세나르협약이 네덜란드모델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조합의 임금삭감 결단 때문이다. 이 양보를 고리로 하여 근로시간 단축과 고용창출 그리고 정부의 세제 지원 등의 합의 패키지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계속되는 네덜란드의 사회협약의 핵심에는 워크셰어링을 통한 일자리 창출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임금과 근로시간을 주고받는 식의 일자리 창출 비법은 적어도 이번 세계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사회적 대화 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한국의 사회적 대화도 15년여의 짧지 않은 역사를 자랑한다. 1987년의 정치민주화와 1997년의 외환위기와 같은 커다란 정치경제적 변화를 거치며 노사관계도 요동을 쳤지만 그 때마다 노사정은 위기를 극복해 왔다. 노동법을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한 '따라잡기 노동개혁'(catch-up reform)에도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특히 노동법 개정은 헌법 개정보다 어렵다는 속설을 증명하듯이 지난 20여 년간 항상 노사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주요한 노동법 개정을 철저하게 사회적 대화의 틀 속에서 추진했다는 사실은 한국의 사회적 대화 기반이 그렇게 허술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양적으로도 매우 풍부한 대화 경험을 축적했다. 1996-1997년의 노동법 개정과 1998년의 사회적 대타협, 2003년의 근로시간 단축과 2006년의 비정규직 보호법 등의 법개정 경험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일자리 중심의 사회협약과 대비되는 한국적 특성이다. 2004년과 2009년에 있었던 일자리 협약은 미약하나마 한국 사회적 대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노사정위원회 경험은 일본⋅중국⋅베트남⋅몽고 등에서 벤치마킹하는 모범사례가 되었다.
노동조합의 조직체계를 보거나 보수적인 정치지형을 볼 때 한국의 정치사회 구조는 사회적 대화에 매우 척박한 토양이다. 그럼에도 OECD 국가에서 특이할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적 대화의 전통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밑으로 부터의 민주화 개혁이 있었고,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운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주화 과정에서 성장한 강한 노동운동의 존재로 인하여 정부가 일방적인 돌진형 개혁이 아니라 대화하고 타협하는 개혁방식을 선택해 왔다고 하겠다.
사회적 대화의 생로병사를 결정하는 두 가지 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