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포피를 단 영국 어린이들.
김용수
한국의 11월 11일은 상업성이 넘치는 '빼빼로데이'다. 그러나 이런 들뜬 분위기와 달리 영국의 11월 11일은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는 듯 차분하고 조용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영국 노팅엄의 비스톤 광장. 이곳을 오가는 많은 사람이 가슴에 종이꽃을 달고 있다. 어린아이,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 젊은이, 노인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가슴에 단 종이꽃은 다름 아닌 포피(Poppy)다.
포피는 해마다 영국의 11월 11일을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영국에서 이날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하다 전사한 사람을 추모하는 날이다. 주지하듯이 1918년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다. 미국에서는 이날을 1954년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전환하여 기념하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1946년 영령기념일(Remembrance Sunday)로 이름을 바꿔 기념하고 있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학교를 비롯한 영국 전역에서 2분간 묵념 사이렌이 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과 총리를 비롯한 지도층이 참여한 공식 추모기념식이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린다. 이 기념식은 <비비시(BBC)>를 통해 생중계된다. 교회에서도 11월 두 번째 주 일요일을 공식 기념일로 정해 추모 예배를 한다.
2분간의 묵념 사이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매년 울리고 있다. 사람들은 고개 숙여 묵념을 할 때 "제1·2차 세계대전 중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최근 전투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한다. 영령기념일 묵념은 영국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기념일을 맞아 웨스트민스터, 카디프, 그리고 우튼 바셋의 주요 공원묘지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영령기념일을 전후해 수많은 사람들이 묘지를 방문한다. 웨스트민스터 공원묘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에서 임무 수행에 헌신한 사람들이 묻힌 곳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의회광장에 자리 잡고 있으며, 11월 11일 정오부터 11월 21일 오후 4시까지 일반에 개방된다.
전사자를 추모하는 포피는 1915년 젊은 의사 존 매크레(John McCrae)가 쓴 '플랑드르 벌판에서'라는 시에서 유래한다. 매크레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플랑드르의 참호와 진흙탕에서 개양귀비(포피)를 발견하고 이 시를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 정치가인 모리아 미셀이 매크레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돈을 모으고자 포피를 팔기 시작한 데서 오늘날과 같은 포피 전통이 시작되었다.
포피는 빨간색과 하얀색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빨간색 포피는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것이고, 하얀색 포피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얀 포피는 '전쟁으로 낯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갈등을 해결할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1928년 영국에서 포피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빨간 포피만 있었지만, 1933년 여성연합이 하얀 포피를 처음 사용하면서 포피의 색은 두 가지가 됐다. 평화선언연합에 따르면, 로열 브리티시 리전(The Royal British Legion)이 빨간 포피의 중간에 '전쟁 반대(No More War)'를 새기지 않은 것에 반발해 하얀 포피가 등장했다고 한다. 현재 영국에서는 하얀 포피보다는 빨간 포피를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빨간 포피와 하얀 포피.
김용수
"우리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한다"
영국군 전사자 현황 |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제1·2차 세계대전 제외).
1922~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233명, 1948~1960년 말레이시아에서 340명, 1949년 양쯔강 사고로 46명, 1950~1953년 한국전쟁에서 765명, 1951~1953년 이집트 운하 지역 비상사태로 54명, 1952~1960년 케냐에서 12명, 1955~1959년 사이프러스에서 105명, 1956년 수에즈 위기로 22명, 1962~1975년 오만과 드호파에서 24명, 1962~1966년 보르네오에서 126명, 1963~1967년 아덴에서 68명, 1969~1998년 북아일랜드에서 763명, 1982년 포클랜드 제도에서 255명, 1990~1991년 걸프전에서 47명, 1992~2001년 발칸에서 48명, 2000년 시에라리온에서 1명, 2001년 이후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343명, 그리고 최근까지 이라크 전쟁에서 400여 명.
|
로열 브리티시 리전은 영국군으로 복무했거나 지금도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재정적·사회적·정서적 지원을 하는 자선단체다. 1921년 창립돼 현재 38000명 이상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퇴역 군인 및 그 가족들에게 보호소나 영국 전역의 복지센터(Welfare Break Centre)를 통해 장·단기 보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집수리를 위한 대출 등 일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긴급 지원이 필요한 경우, 재정적으로 어려운 퇴역 군인과 그 가족을 돕는 역할을 한다.
포피는 1928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11월 11일을 기념할 목적으로 로열 브리티시 리전의 공장에서 만들어졌으며, 기념일 3주 전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곳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화환, 작은 가지, 목걸이 화환, 십자가 형태의 포피는 대략 9파운드(약 16000원)에서 20파운드(약 36000원) 사이로 로열 브리티시 리전에 주문해 구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일반인이 가슴에 부착하는 작은 포피의 가격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1파운드부터 자신이 기부하고 싶은 만큼 기부한 후 영령기념일을 생각하며 포피를 가슴에 부착한다. 또한 차량 앞에 달고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11월 11일이 지난 후에도 가슴에서 포피를 떼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