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을 방문한 백제 사신의 모습. 이들의 임무 중 하나는 조공무역이었다. 사진은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의 몽촌역사관에 걸린 그림을 찍은 것.
김종성
19세기 중후반까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지침서였던 <예기> '왕제' 편에서는, 제후는 매년 최소 한 번씩 황제를 예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용>에서는 "(황제 입장에서) 가는 것을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은 제후들을 품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표현을 두고 주자(1130~1200년)는 "잔치와 하사를 후하게 하고 공물 납부를 박하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중국 내의 황제-제후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외국 관계에까지 적용되었다.
이 원칙의 요지는, 황제는 조공을 적게 받고 회사를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많이 하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중용>에서는 그것이 제후들을 품는 길이라고 했다. 그것은 황제국이 제후국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청나라 같은 예외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조들은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제후국에게 제공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요즘 말로 하면, 중국이 제후국과의 관계에서 대체로 무역적자를 보았다는 것이다. 퍼주기 외교를 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베푸는 외교'를 한 것이다.
이처럼, 조공무역이 황제국 입장에서는 적자무역이고 제후국 입장에서는 흑자무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이웃나라들 중에는 국가적 위신을 무릅쓰고 중국에게 더 많이 조공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풍부하다. 그중 2가지만 소개하겠다.
조선-명나라, 명나라-일본 무역을 통해 본 중국의 퍼주기 외교한 가지 사례는 1397년 조선-명나라 무역분쟁이다. 조선은 1년에 3차례 조공하겠다고 우기고 명나라는 3년에 1차례만 조공하라고 버티는 바람에 생긴 분쟁이다. 조공을 하면 할수록 중국이 적자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이 분쟁은, 1398년에 조선에서 정도전의 자주파 정권이 붕괴하고 1400년에 이방원의 친명파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방원 정권이 명나라의 대외전략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명나라는 1년에 3차례 조공무역을 하는 데에 동의했다. 그만큼 명나라의 적자폭은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는 각국의 조공 횟수를 <대명회전>이라는 법전에 아예 명문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오키나와 왕국은 2년에 1회, 베트남·태국은 3년에 1회, 일본은 10년에 1회 조공을 할 수 있었다. 조선은 1400년부터 1년에 3회를 하다가 1534년부터 1년에 4회를 했으니,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한 무역특혜를 부여한 셈이다. 명나라는 '퍼주기'를 하고 조선은 '퍼받기'를 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1551년 명나라-일본 무역단절이다. 1404년 이래로 명나라와 무역관계를 개설한 일본은 '10년 1회 조공'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10년에 1번만 오라고 하는데도, 어떤 때는 8년 만에 찾아가는 바람에 명나라의 항의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 눈치가 보이면, 10년에 1번만 가되 조공 물량을 규정보다 늘리는 편법을 발휘했다. 많이 조공하면 그만큼 더 많은 회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편법에 대해서도 명나라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일본 측의 행태가 시정되지 않자, 1547년에 명나라는 복건성 영파 즉 푸젠성 닝보에 도착한 일본 조공선박을 10개월씩이나 묶어두기도 했다. 그런 방법으로 일본측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다가 1551년에는 대일 무역관계를 아예 전면적으로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결국 그로부터 41년 뒤인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며 조선을 침공하는 사태로까지 연결되었다.
중국은 왜 적자 무역 포기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