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사망한 고 서정우 하사.
국방부
"배야 꼭 떠라, 휴가 좀 나가자."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으로 전사한 서정우 하사(병장에서 1계급 특진)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문패'에 걸린 글귀다. 서 하사는 휴가 하루 전인 22일 오후 8시 54분에 "내일 날씨 안 좋다던데, 배 꼭 뜨길 기도한다"는 글을 남겼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제대를 한달 앞둔 서 하사는 G20정상회의 비상근무 때문에 말년휴가가 계속 연기되었다가 23일 휴가를 명받았으나 기상악화로 배가 뜨지 못해 부대에 남아 있다가 전사했다.
서 하사는 송영길 인천시장의 고등학교(광주 대동고) 26년 후배이자 친구의 조카이다. 송 시장은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트위터에 "호국훈련을 군이 연평도 일원에서 수행하는 도중 북측의 훈련 중지 경고통지 등이 있었으나 우리 군에서 북측이 아닌 방향으로 포사격 훈련을 하자 이에 자극 받은 북이 우리 군 포진지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글을 올렸다가 보수정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누리꾼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데모하다가 온 놈 1보(步) 앞으로, 전라도 광주에서 온 놈 1보 앞으로"꼭 30년 전의 일이다. 대학 2학년인 80년 4월 17일에 입소해 논산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육군 기본훈련) 한달을 마치고 후반기 교육(중화기)으로 바뀌는 시점에 5·18이 터졌다. 나는 '광주의 사태'(그때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불렀다)를 파악하기 위해 기간병 내무반 불침번을 자원했다. 기간병 내무반에 가야 신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는 재수하는 남동생과 여고에 다니는 여동생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다행히 시골 본가로 피해 화를 면했다.
한달 간의 후반기 교육이 끝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런데 자대에 배치되자 증오에 불타는 고참의 구타와 린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면 날마다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구호가 붙은 차고에서 날마다 닦달을 당하고 조인트를 까이거나 명치를 맞아 숨이 턱턱 막혔다. 딱히 이유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 고졸이었던 고참은 광주에서 발생한 학생데모 때문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휴가 못간 분풀이를 신병들에게 해댔다. 그는 집합을 시켜놓고 어둠 속에서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데모하다가 온 놈 1보(步) 앞으로!", "전라도 광주에서 온 놈 1보 앞으로!"를 구령했다. 나는 대학생에다가 광주 출신이었으니 그 고졸 고참의 분풀이를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에게는 분풀이를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일종의 마녀사냥이었다.
나를 구타한 것은 고참이지만 그도 군사독재의 피해자였다. 민주화를 짓밟고 전군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전두환이니 결국 나를 구타한 것은 전두환 독재였다. 용기가 부족한 나는 대학에 복학해 다른 친구들처럼 '밧줄'을 타지는 못했으나, 5월이면 '광주사태'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에는 빠짐없이 가담했다. 하루는 예비군복을 입고 시위를 마치고 가는데 방석복을 입은 낮 익은 '짭새'와 마주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경찰이 된 그 고참이었다. 반갑게 아는 체를 했지만 매우 어색한 만남이었다.
서 하사의 애먼 죽음, 송 시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뭇매질을 보고서 30년 전에 내가 겪은 구타와 린치가 떠올랐다. 인천시청 홈페이지와 트위터에 나타난 민심의 반응은 대체로 언행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과 시장이 트위터에 글이나 올릴 정도로 한가하냐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또 보수언론의 말폭탄과 보수정당의 색깔론 공세를 감수해야 할 만큼 북한의 공격을 비호하거나 대변한 것일까?
송영길은 시장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