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드라마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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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드라마 <근초고왕>의 주인공인 백제 근초고왕(감우성 분)은 '고대왕국 백제의 기틀을 확립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특히 영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북쪽으로는 고구려 영토 일부를 점령하고 남쪽으로는 마한 지역을 복속시킴으로써 백제의 영역을 남과 북으로 팽창시켜놓은 것이다.
영토 팽창과 관련한 근초고왕의 업적은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실제 업적이 한 눈에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다고 <삼국사기>가 그의 업적을 일부러 감추었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독자들이 그의 실제 성적표를 쉽게 인식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초고왕은 황해도 재령에 수도를 두었다<삼국사기>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업적 중 하나는,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의 결과로 황해도에 도읍을 둔 사실이다. 흔히들 역대 백제의 수도 가운데에 한성(서울)이 최북단에 있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북쪽인 황해도에도 백제의 도읍이 존재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에 단서가 되는 사건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백제의 수도는 한성,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때는 근초고왕 26년 10월(371.10.25~11.23)이다.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 "(재위) 26년 겨울, 근초고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써 싸우며 막았으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근초고왕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고,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 편: "제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도읍을 한성(漢城)으로 삼았다." 이 기록을 검토하기에 앞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위의 '지리지'에 나오는 '남평양'이란 지명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위의 '지리지'를 읽다 보면 '남평양이 한성 즉 서울이 아니었나?'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한성을 최초로 점령한 때는 장수왕 63년 9월(475.10.16~11.13)이었다. 근초고왕이 남평양을 함락한 때로부터 100여 년 뒤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근초고왕이 점령한 '고구려 남평양'은 한성, 즉 지금의 서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실학자 박지원은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 '도강록' 편에서, 평안도뿐만 아니라 요동(만주)에도 고구려의 평양이 있었다고 했다.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똑같이 말했다. 고구려의 북평양은 만주에 있었고 남평양은 지금의 평안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서울이 남평양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초고왕 본기'에서는 서기 371년 10월 혹은 11월에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함락한 뒤에 '한산'으로 천도했다고 했고, '지리지' 백제 편에서는 이 '한산'이 '한성'을 가리킨다고 확인해 주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다. 한성에 도읍을 둔 백제가 평양을 함락한 뒤에 한성에 도읍을 두었다니,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새로 천도한 한성이 경기도 광주 지방 같은 곳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놓고 바로 옆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어딘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평양성을 함락했으면 한성에서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가?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 이게 가능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