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가 80센티밖에 안 되는 부엌문
김수복
큰 기둥에 작은 문짝이 희귀해서 뜯어내지 못했던 집처음 이 집을 사서 왔을 때 눈길을 끄는 게 둘 있었다. 옆에서 사람들은 천석꾼네 집을 사서 왔으니 너도 곧 천석꾼 부자가 될 거라는 둥 덕담을 건네고 있었지만, 천석꾼이나마 내 귀에 그런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고 눈만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집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러 보기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처음 보는 집이었다.
대들보가 거의 한 아름이나 되는 집, 이런 집을 내가 언제 보았던가? 없었다. 적어도 일반 가옥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연륜이 깊은 사찰이나 서원 혹은 사당 같은 데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일반 주택에서는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대들보가 그렇게 크다 보니 서까래는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의 기둥을 연상케 했다. 마룻장 또한 일일이 홈을 파서 정교하게 집어넣는 공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까워서 도저히 뜯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두 뜯어내는 방식의 대대적인 수리를 생각하고 집을 샀었지만 아주 간단하게 화장실과 보일러 시설만 추가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 것이었다. 보일러도 방을 뜯어내고 공사를 한 것이 아니라 애초의 방바닥 위에 그냥 깔기만 했다.
또 하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부엌문이었다. 집의 모든 문들이 큼직큼직하고 쌍으로 되어 있는데 오직 하나 부엌문만은 예외였다. 외짝문에 높이는 겨우 '에게~'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8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의 우리 집도 부엌문이 그렇게 작지는 않았다. 도대체 아름드리 대들보를 사용할 정도의 스케일을 가진 집에 이토록 작은 부엌문을 달아놓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뭐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오는 사람마다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은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에 기초한 것 아니겠느냐고, 뻔한 질문을 왜 하느냐는 투로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여자가 밥상을 들고 들어올 때마다 허리를 90도로 구부릴 수 있게끔 구조적으로 장치를 한 것이라는데 글쎄,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 해도 썩 그렇게 와 닿는 추리는 아니었다. 다른 또 한 사람은 부엌에서 찬바람이 많이 들어오니까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되었다. 부엌은 마루 쪽에 비하면 오히려 온기가 더 많은 곳이었다. 찬바람을 피할 목적이라면 부엌문이 아니라 마루 쪽의 문이 작아야 말이 되는 것이다.
"야, 이것은 중요한 민속자료다. 보존해야 한다."이렇게 해서 그 작은 문짝은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게 되었다. 문짝은 물론 문틀도 털끝 하나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집수리를 하다 보니 부엌과 방의 높이 차이가 무려 40센티나 되었다. 이 차이가 훗날 어머니를 와당탕 소리로 요란하게 굴러떨어지게 하는 등 심한 고통의 씨앗이 될 줄이야, 그때는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민속자료를 폐기처분한 뒤에야 그 뜻을 알았다 그 작은 문짝을 온전한 형태로 보존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의 큰 문을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탓인지 작은 문에는 도대체가 적응이 안 되었다. 들어가면서도 쿵, 나오면서도 쿵, 하루에도 십수 번씩 쿵, 쿵 하다 보니 이마가 성할 틈이 없었고, 잠에서 막 깬 뒤에는 부엌으로 나오다가 그만 허당을 딛고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의 원성 또한 대단했다. "먼놈의 집구석이 허우대는 멀쩡한데 속내는 이 모양"이냐는 둥, "다시는 이놈의 집구석에 발걸음을 안 한다"는 둥 저주와 악담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마음에 여유가 넉넉했다. 손님들이야 불평을 하건 말건, 악담을 퍼부어대건 말건 내 나름의 커다란 공부를 하고 있다는 내심의 여유가 있었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마를 부딪치면서도 문짝을 뜯어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모셔오면서부터 '야, 이거 문짝이 문제로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한 번씩 들기 시작하더니, 서너 달 전부터 어머니의 거동이 매우 불편해지면서부터는 '야, 이거 문짝이 정말 큰 문제로구나'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고 있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 민속자료로 지정한 문짝을 없애기로 안타까운 결심을 하고 추석 다음 날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너무나도 뜻밖의,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의 열쇠가 방바닥 속에 숨겨져 있었다. 구들장이 어지간한 멍석만하고, 그것을 받치는 굄돌은 성곽을 쌓을 때나 씀직할 정도로 높고 길어서 혼자서는 들어내기도 버거웠다. 어린 시절에 구들 놓는 장면을 몇 차례 보았지만 이렇게도 연기의 통로가 높고 넓은 것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