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느강변 떠나믄 우리는 모다 죽어요!"

군산 60년 돼지국밥 골목 헐릴 위기..시관계자 "청결·미관 갖추면 테마거리 지정"

등록 2010.10.30 11:19수정 2010.10.3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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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나가면서 겨울의 문턱인 입동(立冬)이 가까워지면, 따사한 햇볕이 그리워지고 얼큰한 돼지국밥 한 그릇이 생각난다. 고소하고 따끈한 국물로 속을 풀면서 꼬들꼬들한 곱창을 안주로 친구와 소주 한 잔 나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런데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지난 2006년 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을 받아 재건축이 결정되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문화관광형 전통시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공사를 진행 중인 군산 공설시장(구시장)의 '돼지국밥집 골목'(일명 세느강변)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개장한 군산 공설시장. 사진 상단은 째보선창이고요. 오른편에 서 있는 굴뚝과 대형 창고(가등정미소)들이 보이는 걸 보면 1930년대 이후에 촬영한 사진으로 짐작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개장한 군산 공설시장. 사진 상단은 째보선창이고요. 오른편에 서 있는 굴뚝과 대형 창고(가등정미소)들이 보이는 걸 보면 1930년대 이후에 촬영한 사진으로 짐작됩니다. 군산시청


일제강점기(1918년)에 '신영시장'으로 개장한 공설시장은 몇 년 전 내흥동으로 이전한 기차역과 공설운동장을 끼고 있어 한때는 강경, 논산, 부여, 대천, 서천, 장항 등 충남 일부와 김제, 부안 등 전북 서부권 주민들도 이용하면서 지역의 서민경제 중심지가 되기도 했던 역사 깊은 장소다.

돼지국밥집 13곳, 보신원 1곳, 그릇가게 1곳이 영업 중인 세느강변은 원래 약단지에서 대형 김칫독까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질그릇을 진열해놓은 가게들이 이웃한 '옹기전 골목'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돼지국밥집이 하나씩 들어서고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면서 군산 시민은 물론 외지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아왔다.

원래 공설시장과 돼지국밥집이 모여 있는 옹기전 사이엔 째보선창으로 유입되는 '샛강'(일명 깨꼬랑)이 있었다. 이후 1970년대 중반 복개공사로 샛강이 사라지자 국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아련한 추억을 잊지 못해 프랑스 세느강에 빗대, 세느강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세느강변은 이곳의 별칭이자 애칭이다. 

세느강변 돼지국밥은 시골에 사는 노인층은 물론 40~50대 중년층에게도 인기가 좋다. 60~70년대 학교에 다녔던 그들은 점심 도시락에 밥 대신 찐 고구마를 서너 개씩 넣어서 다녔고, 학교를 오가며 지나야만 했던 공설시장에서 풍겨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한 그릇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던 추억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시민과 업자들의 하소연

 군산 공설시장 세느강변 돼지국밥집 골목 저녁풍경, 좌측 주차장은 째보선창으로 유입되는 '샛강'이 흐르던 자리입니다.
군산 공설시장 세느강변 돼지국밥집 골목 저녁풍경, 좌측 주차장은 째보선창으로 유입되는 '샛강'이 흐르던 자리입니다.조종안



"부담 없는 가격에 이런저런 추억을 얘기하며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즐겨 찾았던 신영동 세느강변 돼지국밥집 골목이 공설시장 건물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길을 넓힌다는 이유로 사라지는 건 서민들이 겨울에 애용하는 사랑방을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죠. 맛과 향수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전통 있는 장소이니까 보존돼야 합니다." 

취재 중에 만난 시민들은 하나같이 안타까워했고, 대답도 같은 내용이었다. 재개발을 이유로 돼지국밥집 골목을 없애는 것은 적은 돈으로 친구와 밥도 먹고, 소주도 한잔할 수 있는 대화의 장소를 없애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

세느강변 '서울집' 주인아주머니(65)는 내년 8월에 공사가 끝나고 이곳 업소들을 재건축 시장건물 2층 식당가로 옮기면, 현재 영업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죽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그서 세를 살믄서 장사를 허요. 근디 시청서는 우리 모다(모두) 새 건물 2층으로 가서 장사를 허라고 헙니다. 글믄 좋아요. 여기 있는 세입자들이 내년에 모다 2층으로 올라간다고 봅시다. 새 건물로 들어가니께 좋지요. 허지만 장사는 안 돼요. 왜냐. 여그 집주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내줄 것 아니것소. 그라믄 우리는 터만 닦아놓고 공중으로 뜬 고무풍선이 되야뿔고, 서로 경쟁이 붙은 게 모다 죽는다 이 말입니다. 그르니께 우리가 여그서 그냥 장사허도록 놔두는 게 젤 좋다 이거요. 우리는 여그다 목매고 사는 사람들잉게···."

아주머니는 세느강변 업소들이 헐리고 새로 건축하는 건물 2층으로 이사하게 되는 것도 단골손님이 와서 얘기를 해주어서야 알았다며 어이없어했다. 업주들은 골목 주변을 청결하게 정비하고 작업장을 설치해서 영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하나같이 말했다. '잠깐만집' 주인 황승운(54)씨는 그동안 과정을 설명하며 답답해 했다.

"몇 개월 전이었어유. 시청에서 두 분이 와서는 가게 앞 주변을 정리해주겠으니 작업을 안으로 들어가서 하라고 허드라구유. 그려서 보시다시피 가게가 좁아 들어갈 장소가 없다면서 작업장을 설치해달라고 혔쥬. 그랬더니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며 가더니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나와서는 길을 넓히겠으니 새 건물로 이사하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되믄 여기 업주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세느강도 사라지거든유."

업주들은 지난 5일 시청 직원들과 몇 시간에 걸쳐 좌담회를 진행했지만, 시원하게 결정된 게 없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들은 대부분 전세나 월세로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다면서 새 건물로 입주한다고 해도 부담이 된다며 하소연했다. 

세느강변 돼지국밥이 맛있는 이유

'회현집' 주인 김진호(65)씨는 세느강변 돼지국밥이 맛있는 이유는 국물이 진국이고 반찬 하나도 싱싱한 양념으로 정성 들여 만들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머리 7~8개와 내장 등을 넣고 푹 고아낸 국물에 다시 뼈를 넣고 종일 고았으니 고소할 수밖에 없다고.

 뚝배기에서 펄펄 끓고 있는 돼지국밥. 국물이 진국이어서 담백하고 고소한데요. 싱싱한 부추가 입맛을 더욱 당기게 합니다.
뚝배기에서 펄펄 끓고 있는 돼지국밥. 국물이 진국이어서 담백하고 고소한데요. 싱싱한 부추가 입맛을 더욱 당기게 합니다. 조종안

 싱싱한 부추 겉절이가 돋보이는 돼지국밥 상차림. 들깻가루를 듬뿍 넣으니까 국물이 초콜릿색으로 보이는데요. 보신탕으로 착각할 정도로 고소하고 담백합니다.
싱싱한 부추 겉절이가 돋보이는 돼지국밥 상차림. 들깻가루를 듬뿍 넣으니까 국물이 초콜릿색으로 보이는데요. 보신탕으로 착각할 정도로 고소하고 담백합니다. 조종안

세느강변 돼지국밥 특징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투가리'(뚝배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그릇을 주문해도 따로 끓여 내오고, 고기양이 많아 국밥 한 그릇만으로도 소주 한 병 안주는 충분하다는 게 김진호씨 설명이다.

국밥 한 그릇에는 연하고 고소한 맛이 별미인 머리고기와 꼬들꼬들한 내장 등 돼지의 다양한 부위가 들어가는데, 손님이 구미에 맞는 부위를 많이 넣어달라고 주문하면 요구대로 들어준다고. 내가 보기에도 가게는 허름했지만, 음식을 깔끔하게 차려주는 것이 손님들에게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싶었다. 뒷맛이 개운한 새우젓과 적당히 익은 깍두기, 한 사람이 가도 즉석에서 버무려주는 싱싱하고 상큼한 부추 겉절이가 입맛을 돋워주기 때문이다.

군산 경제와 관광객 유치에도 한 몫

'중동집' 주인 박윤봉(56)씨는 세느강변 골목은 군산의 서민경제와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 하고 있으니까 시청에서도 알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밥집 13곳에서 판매되는 돼지머리가 하루에 170~180개 정도 되고, 행사가 많은 봄가을에는 200개 넘게 소비하는 날도 있다는 것.
 
 세느강 돼지국밥집 골목이 군산 경제와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 하고 있다고 조목조목 설명하는 중동집 주인 박윤봉씨
세느강 돼지국밥집 골목이 군산 경제와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 하고 있다고 조목조목 설명하는 중동집 주인 박윤봉씨 조종안

"이곳 가게들은 한 그릇에 6천 원씩 받는 국밥만 파는 게 아닙니다. 고사 머리와 편육도 많이 나가요. 고사를 지내거나 개업 집에서 많이 사가는 돼지머리는 하나에 2만 5천 원. 머리 고기는 2만 원. 큰 행사나 잔치 때 빠지지 않는 편육(누른 고기)은 한 근에 6천 원씩 파는데요. 외지에서도 전화가 많이 걸려옵니다."    

박씨는 군산 손님들만 이용하는 게 아니고, 충남 장항, 서천은 물론이고 한산, 대천, 전북의 익산, 김제, 전주에서까지 와서 사가고, 강원도나 경상도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식당을 경영한다는 교포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와 편육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사정해서 기술을 전수해주고 만드는 기계를 제작하는 공장까지 알려주었던 일화도 털어놓았다.

진출입로 확보 최소화해서 명소로 지정해야

주말에는 가족이 함께 세느강변을 찾는다는 한 시민은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돼지국밥집 골목을 없애는 것에 반대한다"면서 "시민과 관광객이 즐거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도록 돼지고기 부산물을 다루는 과정을 청결하게 하고, 골목도 시대에 맞게 정비해서 명소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출입로 폭을 최소화하고 공동 작업장을 설치해서 지금의 장소에서 영업을 계속하게 되기를 업주들이 요망하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군산시 관계자는 "시에서도 세느강변으로 불리는 '돼지국밥집 골목'을 군산을 상징하는 명소로 보전하려고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8월에 완공되는 재건축 건물 2층 입주 문제는 전적으로 업주들 의사에 달려있다"면서 "부산물 관리와 간판 정리 등 청결과 미관을 갖추고 단체를 구성하면 공식협의를 통해 (이곳을)군산의 재래시장 역사와 음식문화 중심의 테마거리로 조성하고, 예산을 세워 공동작업장도 설치해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업주들에게 단체 구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공동작업장을 설치하고 음식 테마거리를 조성한 후에 업주들이 스스로 냉동실과 냉장고 등 작업장 내부와 거리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돼지국밥집 골목 #군산 세느강변 #공설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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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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