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치밀하게 집권을 준비해오던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학살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다. 만일 민주화운동 세력이 치열한 반유신투쟁 와중에도 박정희 이후의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5월 광주의 학살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MBC
박정희의 사망은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새로운 희망을 알린 소식이기도 했다. 18년간 무소불위의 독재체제를 구축한 박정희의 사망으로 인해, '민주시대'의 도래는 당연한 순서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는 종이집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 박정희는 사라졌지만 유신체제를 떠받들던 국가폭력기구와 군부의 정보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게다가 위로부터의 박정희 암살이라는 독재체제 해체의 조건이 마련된 상황에서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힘은 형성되지 못했다.
당시 민주진영의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국이 민주화냐 구체제로의 회귀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와중에도 민주진영은 정치적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야당은 새로운 민주시대를 열 주체로서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유신체제에서 성장한 신군부세력은 달랐다. 군부에 대한 정보를 가장 광범위하게 수집할 수 있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면서 권력의 중추에 섰다.
그는 부마항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김재규와 차지철을 동시에 제거하고 보안사가 주도해 새로운 개혁을 하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박정희에게 보고하려다 10·26을 맞을 정도로 권력의 중심이 될 준비를 치밀하게 준비해 오고 있었다.
신군부는 10·26 이후 일사불란하게 12·12군사쿠데타를 비롯한 정권 장악 프로젝트를 실행시켜 나갔으며,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목표로 경쟁자들을 하나 둘씩 제거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야당 지도자들이 이미 준비된 전두환을 이기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세력 중 유일하게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한 것은 학생운동세력이었다. 1980년 초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고 5월 들어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펼쳐나간 학생운동진영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민주세력 참여 없는 개헌논의 중단을 요구하는 등 가장 정확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5월 15일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가두시위 철수 이후, 전두환 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했고, 결국 저항을 계속한 광주에서는 피의 살육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울의 봄은 짧았고, 민주주의의 여름은 한참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대안 없는 저항의 한계김재규는 그의 법정진술처럼 '유신의 심장'만 쏘면 독재체제는 저절로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10·26사건과 뒤이은 서울의 봄의 좌절은 독재자 한명이 사라진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줬다.
만일 박정희 체제가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서가 아니라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힘으로 무너졌다면, 또한 당시 야당세력이 역사적 대의를 존중하고 학생운동진영 등 다양한 세력과 힘을 결집해 '박정희 이후의 대안'을 모색해 나갔다면, 신군부세력과의 대립양상은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80년 5월의 살육이 없었을 수도 있고, 1987년의 전환이 좀 더 빠른 시기에 도래했을지도 모른다.
저항에는 능숙하지만 저항 대상이 사라진 이후의 대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오늘의 정치세력 역시 30년 전의 상황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0·26사건과 뒤이은 정치과정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은 '대안을 내포한 저항'만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과 새세상연구소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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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박정희 죽었는데도 세상을 못 바꾼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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