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움직이는 영남대의 힘?영남대 및 대학원 출신의 18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학교홍보에 활용한 한 일간지의 광고면.
김당
김영삼 정부 시절 '사정 드라이브' 정국에서 거악에 맞선 스타 검사로 떠올랐던 홍준표 의원이 모교인 고려대에서 세계적인 마라토너 황영조와 함께 '자랑스런 고대인'으로 선정돼 고려대 광고모델로 나선 적도 있고, 지난 2008년 18대 총선 뒤에는 영남대가 학부나 대학원(특수대학원) 출신 국회의원 17명의 얼굴 사진을 싣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영남대학교의 힘!'이라고 난데없는 '힘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박 전 대표의 비키니 사진과 신문광고 모델이 새삼 화제가 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희소성과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라는 점이 상승작용을 한 결과로 보인다. "서강대학교 이공계가 대한민국을 이끌겠습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박근혜가 대한민국을 이끌겠습니다"라는 중의적 표현으로 읽힌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그래서 박근혜의 신문광고 출연은 기본적으로 모교의 요청에 따른 것이지만, 그가 장기적으로는 2012년 대선을 겨냥, 복지정책 '열공'과 함께 취약한 수도권과 20~30대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해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과학기술 입국'(立國)과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의 3위일체사실 박근혜의 과학기술, 혹은 이공계 사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박근혜는 자서전의 곳곳에서 '과학기술 입국'(立國)과 아버지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 자신을 3위일체로 등치시키고 있다.
"그(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1970년대 후반-편집자주) 무렵 나는 전자산업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도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자산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계셨다…(중략)…나는 전자공학과 관련된 부분만큼은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9년 아버지를 설득해 제10회 한국전람회의 전자전에 참관한 것도 전자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높이고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과학기술에 대한 아버지의 집념은 대단했다. '자원도, 돈도 없는 우리나라가 먹고살 길은 사람으로 하는 과학기술 연구밖에 없다'면서, 1966년 홍릉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설립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 있던 과학자들에게 조국으로 돌아와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200명이 넘는 과학자가 척박한 연구환경에도 불구하고 애국심 하나만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104~105쪽)박정희의 과학기술 지원은 객관적 사실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자서전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을 먹여살리는(?) 삼성전자의 힘은 오롯이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남다른 과학기술 지원과 이공계 사랑 덕분인 것처럼 읽힌다. 더구나 박정희의 과학기술 및 이공계 사랑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버젓이 사실 왜곡을 하고 있다.
이공계 기피 현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탓?그는 자서전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지난 1960년대 중국은 경제발전과 공업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이공계 출신들을 키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분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오늘날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실을 지난 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다.
"후 주석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공계를 기피하는 우리네 현실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졌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 먹고살 길은 기술혁신밖에 없다며 과학기술에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당시 과학자들이 청와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아버지는 틈만 나면 연구현장에 나가 과학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격려했다. 그것이 우리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IMF가 터지자 기술인력을 제일 먼저 구조조정하고 R&D 비용을 축소하면서 과학기술 기반이 일거에 무너져 내렸다. 40년에 걸쳐 쌓아온 기반이 무너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292쪽)요컨대, 박정희가 집권한 1960년대부터 전두환-노태우를 거쳐 IMF를 초래한 김영삼까지 군부독재-보수정권 40년 동안 과학기술 기반을 쌓았는데, IMF를 계기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그 기반이 일거에 무너져 내렸다는 논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IMF 사태에도 불구하고 연구개발(R&D) 예산을 축소하지 않았으며 과학기술 기반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가 과학기술처(2실 2국 6과)를 신설한 것은 1967년이다. 정부는 과학기술처 개청일인 1967년 4월 21일을 기념해 이날을 '과학의 날'로 제정했다. 그 뒤로 30년 동안 국무총리 산하 '처'(處)였던 것을 독립된 장관의 예산 편성집행권이 있는 과학기술부(3실 3국 21과 9담당관)로 확대 개편한 것은 김대중 정부(1998년 2월)였다. 또 과학기술부에 R&D 예산편성 전문성을 높이고 국가우선순위에 따른 전략투자를 강화하기 위해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1본부 1실 1조정관 6국 7관 30과)해 과기부장관을 부총리로 승격한 것은 노무현 정부(2004년 10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