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정착한 고흥, 우리집에 찾아온 엄니와 여동생. 이사온 지 반년 만에 찿아온 엄니는 집이 좋다며 내내 어린아이처럼 생글생글 웃었습니다.
송성영
지난주 새터 찾아 헤매고 다니랴 정착하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핑계로 한동안 소홀했던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는 중여. 나중에 통화 혀."그리고 그날 늦은 오후 다른 고향 친구로부터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OOO 모친상 충대 병원 영안실.'전화를 받은 다음날 이른 아침. 시간에 맞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 한통이 걸려왔습니다. 충남 공주에서 생활할 때 형 동생으로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배의 전화를 받은 지 단 몇 초도 채 안 됐는데 순간 버스가 지나쳐 버렸습니다. 하루에 딱 한 대, 마을 앞을 지나는 부산행 버스인데 중간에 순천에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그 부산행 버스를 이용해 순천역에서 서대전역까지 기차를 타고 갈 요량이었습니다. 버스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어쩔 수 없이 한 시간 꼴로 찾아오는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엄니가 집에 오신다고 했을 때, 걱정스러웠습니다고향 친구의 엄니는 어린 4남매를 두고 일찌감치 세상 떠난 남편때문에 평생 힘들게 살다 가셨습니다. 마을 뒷산 중턱에 다 쓰러져 가는 초막에서 생활하면서 온갖 허드렛일로 자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공부 시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했습니다. 때문에 고향친구 역시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일찌감치 객지로 나가 스스로 돈벌이를 해야 했습니다.
마을버스는 작은 길들을 골라 다니며 마을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버스 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쭈글쭈글 검게 그을린 얼굴, 굵은 손마디, 갈라진 손등, 생면부지의 낯선 땅, 고흥에서 생활한 지 이제 겨우 반년을 넘기고 있었지만 버스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한결 같이 고향 친구의 엄니 아버지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진즉에 팔순을 넘긴 우리 엄니처럼 말입니다.
고흥으로 이사 온 이후 주변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우리집을 한 두차례씩 다녀갔는데 정작 우리 엄니는 지난 여름에 다녀가셨습니다. 고흥에 자리를 잡은 지 반년이 지나서야 힘든 걸음을 하셨던 것입니다. 엄니는 당뇨로 고생하시다가 허리 병까지 도져 수술까지 한 몸이었기에 고흥까지의 먼 길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 하시던 엄니가 갑자기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던 것입니다.
"니들 집에 가봐야 겠다.""걷기도 힘들다면서요.""괜찮어, 인저 몸이 좀 좋아졌어. 좋아졌을 때 가야지 언제 가보겠어."기운 없던 팔순 노모가 기운을 챙겨 그토록 가보고 싶은 셋째 아들네 집에 오겠다는 데 반가움보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갑자기 기운을 챙기는 경우가 종종 있듯이 걷기조차 힘든 엄니가 갑자기 없던 기운이 생겼다는 것이 뭔가 불길한 증조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형님과 동생들이 엄니를 모시고 우리집에 도착했을 때 엄니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습니다. 대전에서 고흥까지 먼 길을 달려왔기에 승용차에서 겨우 내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길을 잘못 접어들어 한 시간을 더 지체해 장장 5시간 넘게 달려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 주변을 둘려 보던 엄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기운을 챙겼습니다.
"아이구야 좋다. 좋아! 니들 땅이 어디여?""여기서 저기까지요.""아이구, 넓어서 좋다. 넓어서 좋아. 나는 평생 땅 한 평 없이 살아 왔는디 니들이 소원풀이를 했다야. 에미야, 장하다 장해!" 안방에서 빗물이 새고 사랑채 한쪽이 주저앉은 공주 시골집에서 생활 할 때 엄니는 눈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내린다 싶으면 집이 무너져 내릴까봐 늘 걱정이었습니다.
"빗물은 안 새지? 집안도 근사하니 좋다."먼 길 여행으로 안색이 좋지 않았던 엄니의 얼굴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집에는 침대가 없기에 앉고 서는 일이 불편한 엄니를 위해 긴 상을 이용해 침대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체구가 작은 엄니에게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영정사진 앞에선 사는 일도, 죽는 일도 모두 슬픔엄니가 머물던 2박 3일 내내 비가 내려 근사한 집 앞 바다를 보여드릴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떠나던 날, 다들 한자리에 모여 가족사진을 찍고 나서 엄니가 내게 당부하듯 말했습니다.
"대전에 올 때 사진기 챙겨 와라.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영정사진은 찍어놔야지. 젊었을 때 사진은 안 된다드라."공주 시골마을에서 생활 할 때 오래 오래 사시라며 마을의 몇몇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 드렸는데 정작 엄니의 영정사진은 찍어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각의 꼬리를 접을 무렵 마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던 마을버스는 순천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고흥 읍내 버스터미널에 한 시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고흥에서 순천까지 다시 한 시간. 거기서 서대전역까지 2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역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먼저 후배 아버지 장례식장을 찾아갔습니다. 친구 엄니 장례식장은 늦은 저녁에 찾아가기로 친구들과 약속을 했습니다.
후배 아버지는 영정사진으로 처음 뵙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정사진을 보자마자 속에서 울컥한 덩어리가 솟아 올라왔습니다. 고인이 남긴 마지막 모습, 영정사진 앞에서는 사는 일도 죽는 일도 모두에게 슬픔이었습니다. 후배에게는 평소 원망스러웠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럼에도 후배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얼굴을 마주 대하고보니 더 큰 슬픔이 잦아들었습니다.
슬픔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슬픔 그 자체지만 또한 희극 그 자체였습니다. 미리 봉투를 준비하지 못해 부의함 앞에 마련된 봉투를 사용했는데 사람들 보는 데서 지갑을 꺼내는 일이 계면쩍어 급히 부의함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봉투에 이름을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국밥을 먹으면서 좀생이처럼 하필이면 이름을 써 넣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튀김닭 먹던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