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근처 포이에르바흐 공원에서 젊은시절의 필자가 똥폼을 잡고 있다.
조영삼
슈투트가르트의 변방인 망명수용소 인근에는 포이에르바흐란 생태공원이 있다. 이곳에 나는 두고 온 보고 싶은 사람들이 그리울 때면 어김없이 발품을 팔아 찾곤 했었다. 그리고 공원 이름과 포이에르바흐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젊은 날, 이 국제나그네처럼 질풍노도의 방랑기를 거쳤던 젊은 포이에르바흐를 생각하며 많이도 울적해 했었다.
내가 아르헨티나를 떠나 체게바라의 발자취를 거슬러 안데스산맥을 주마간산이나마 섭렵하고 가난에 찌든 인디언들과 생활하면서 젊은 날의 체게바라를 그리워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말이다.
그리고 거의 매일 새벽의 여명을 가르고 공원의 너른 숲 속 공간으로 달려가 아름드리 나무를 상대로 정권을 단련하고 허공을 내지르는 발차기 연습을 산책 나온 슈바벤들을 구경꾼 삼아 수용소를 떠나는 날까지 이어왔던 것이다.
당시 그들은 나에게 '여명의 부루스리'라는 별명을 일방적으로 지어서 부르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나이고 부루스리는 부루스리'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들의 일방적 독주(?)를 막을 길은 없었다.
내가 슈투트가르트 망명수용소에서 조국의 쪽빛 하늘을 그리워하고 있을 때 한국의 원주교도소에선 사노맹을 주도했던 백태웅씨가 징역살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인연은 내가 남북고위급회담 진입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생활할 때 처음 만나 이후 안양교도소에서 다시 만나 교도소내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나는 소년수 사동의 독방에서 외로이 생활하고 있는 백태웅씨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하얀 비둘기 새끼와 비둘기 집을 만들어 백태웅씨에게 주었었다.
그 후 백태웅씨는 소내 민주화투쟁 와중에 징벌방인 먹방에 갇혔고 내가 백태웅씨, 민애전 대변인 조덕원씨, 전대협의장 태재준씨등의 원상복귀를 요구하며 곡기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는 단식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머리가 빡빡 깎인 상태로 원주교도소로 강제 이감을 가고 말았다.
우리의 관계는 그 후 시공을 초월하여 독일의 망명수용소와 한국의 원주교도소에로의 편지왕래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백태웅씨의 장기간의 징역생활을 염려하고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의 정기를 호흡하며 '감자바우' '비탈'등의 자조 섞인 말들로 인구에 회자되는 강원도 한 복판에서 이왕이면 '강원도의 힘'을 맘껏 들이마시라고 격려 편지를 보냈었다.
백태웅씨도 나를 걱정하는 비슷한 편지를 종종 보냈는데,
"수용소라니, 망명수용소라니, 모든 것을 떠나 안타깝고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그 때 조선생님의 당부 말씀대로 다음 징역 이감지까지 친구되어 데려가려 했던 어여쁘고 가련한 하얀 비둘기 새끼는 친구이자 주인인 저를 잃어버리고 언제까지고 구슬피 '구구구' 울고 있더라고 이곳에 이감 온 어떤 재소자가 전해주었답니다...."
한국의 교도소와 독일의 망명수용소!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그 후 백태웅씨는 출소하여 현재 캐나다의 어느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흘러다니는 풍문으로 들었다. 나는 주지하다시피 국제방랑자 되어 희망 찾아 아직도 떠돌고 있고...
방랑은 희망을 잃지 않은 이들이 '보헤미안의 진주'를 찾아 떠나는 희망의 여정이다. 젊은 독자들이여! 고독하고 고민하라. 그리고 희망 찾아 과감히 떠나라. 그러나 당부 드릴 것은 이 국제방랑자처럼 길 위에서 너무 오랜 시간은 보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