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산벌>에 등장한 의자왕(오지명 분, 왼쪽).
씨네월드
백제 의자왕처럼 한국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저렇게 하면 나라를 망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의자왕처럼 좋은 사례도 없다.
의자왕(義慈王)의 '의자'는 사실 그 의자가 아닌데도, 왠지 의자왕이란 말만 들으면 편안히 의자에 앉아 삼천궁녀와 노닥거리다가 나라를 망친 한심한 인물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의자왕과 함께 연상되는 '삼천궁녀의 낙화암 투신' 이미지는 의자왕이 얼마나 몹쓸 인간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의자왕은 '무능하고 인간이 좀 모자라며 색이나 밝힌 왕'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런데 '①무능하고 ②인간이 좀 모자라며 ③색이나 밝혔다'에서 ①'무능하다'는 이미지가 의자왕의 실제 이미지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한국측 사료인 <삼국사기>나 중국측 사료인 <구당서> <신당서> 같은 사료들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 야망에 맞선, '불량 군주' 의자왕팍스 시니카(중국 중심의 세계)를 목표로 온 사방으로 힘을 팽창한 당나라가 서쪽의 돌궐·토욕혼·고창국·토번 등에 대한 제압을 끝내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시점인 서기 641년에 등극한 의자왕은 그로부터 20년 동안이나 당나라의 동진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고구려보다는 빨리 굴복했지만,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백제는 상당히 늦게 굴복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한 다음에야 당나라가 동아시아의 '유일 초강대국'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자왕은 당나라의 야망에 맞서 최후까지 투쟁한 '불량 군주' 중의 하나였다.
또 즉위 이듬해인 의자왕 2년(642) 7월 한 달 동안에 허리케인 같은 기세로 신라의 40여 성을 휩쓸고 간 사실, 멸망 5년 전인 의자왕 15년(655)에도 고구려·말갈을 끌어들여 8월 한 달 동안 신라의 30여 성을 점령한 사실 등은 의자왕이 무능하기는커녕 도리어 상당히 유능하고 위협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결국에는 나라를 잃어 할 말이 없게 됐지만, 660년 백제의 최후 이전까지만 해도 의자왕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도 부담을 느끼는, 꽤 유능한 군주였다. 그런 개인적 유능함을 상쇄하는 여타 요인들이 백제 최후의 날에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나라가 멸망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의자왕을 '해동증자'라 불렀다
다음으로, '②인간이 좀 모자라다'는 이미지는 의자왕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의자왕 본기'(본기는 '제왕의 연대기')나 <구당서> 및 <신당서>의 '동이열전'(열전은 '인물이나 외국에 관한 이야기') 등에서는 의자왕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동방의 증자'라고 부른 것이다.
해동증자라니! 삼천궁녀와 노닥거린 '천하의 난봉꾼' 이미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칭호다.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유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증자를 의자왕과 연결시키다니, '의자왕은 난봉꾼'이라고 교육받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인들이 의자왕을 증자에 빗댄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닮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효도의 모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증자의 특성이 의자왕에게서도 보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논어> '태백' 편을 보면, 증자가 부모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증자에게 질병이 생기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내 손을 보고 내 발을 보아라. <시경>에서 말하기를,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얕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고 했다. 이제야 나는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겠노라.'"'질병이 생겼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해져서 증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처럼 죽음이 예견되는 상태에서 증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이 온전한 것을 확인시킨 뒤에 '이제야 나는 전전긍긍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즉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인식 하에 평생 동안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리한 증자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이 그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손발을 보인 것은 자신이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음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 몸을 관리할 때조차 어버이를 생각했다는 이 일화는, 증자가 얼마나 효성스러운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증자를 의자왕에 빗댄 것은 의자왕이 증자처럼 효성스러운 인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백제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그렇게 평가한 것을 보면, 의자왕의 효성이 국제적으로 얼마나 화젯거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은 부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해서도 극진한 우정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는 의자왕이 '여자와 친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의 의자왕은 '어버이와 친한 인물'이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인간 됨됨이를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은 효성이었다. '인간이 좀 모자라다'의 이미지가 의자왕에게 맞지 않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효성이 지극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의자왕은 '꽉 찬 사람' 혹은 '됨됨이가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의자왕, 술과 이성에 빠진 건 사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