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보관실에 임시 보관된 금정굴사건의 희생자 유골들
이안수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과 대퇴골 등 유골이 선반에 가득했습니다.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서울의 도심, 젊음이 넘실대는 대학로의 한 구석에 이렇게 '코리언 킬링필드'의 참혹함이 간직되어있을 줄이야. 그 유골들은 한국전쟁시기에 부역혐의 및 부역혐의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의 야산에 방치된 폐광인 금정굴에서 집단학살당한 고양 및 파주지역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역혐의 있으면 무조건 살상"... 고양금정굴학살사건1950년 9·28수복으로 북한군 적극 동조자들인 좌익세력이 서둘러 월북한 수복지역의 치안에 경찰조직과 함께 민간인들로 구성된 태극단, 치안대 등의 경찰보조인력이 가담했습니다. 주로 마을의 30, 40대 장년층 우익단체 소속원들로 구성된 치안대는 부역혐의자 및 불온수상자를 체포하는 절대 권력을 발휘했습니다.
인민군 적극 가담자들이 이미 북으로 도피한 상황에서 그들의 가족과 인척뿐만 아니라 평소 개인감정을 가진 이웃들까지 포함한 양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행과 약탈이 동반됐습니다. 당시 고양경찰서장이었던 이무영은 '부역혐의가 조금만 있어도 무조건 살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광기가 지배하던 그 야만의 시기에 서장의 이 지시는 경찰보조인력들에게 기름을 붙는 격이 되었습니다. '빨갱이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유로 부녀자는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린치를 당하고 잡혀갔습니다.
고양경찰서 유치장과 임시유치창고에 감금된 채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공급받지 못하고 고문을 당하다 비비선(유선전화선)에 묶여 마침내 폐광굴 위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측은지심을 지우지 못했던 자유로 트럭 위의 그 흰 돼지는 차라리 호사스러운 죽음의 여행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