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주)강제규 필름
흥남부두, 원산부두로 수 십 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피난길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뱃길 또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역전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남쪽의 상황은 복잡하기만 했다. 1948년 여순 사건에 지하 배후자로 지목되어 맏형이 죽어갔던 것처럼 이번에는 부역자를 사전 검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형은 특별 검거대상이 되었다. 수차례 사복형사들의 수사망을 피했다. 마을 뒷산 재각 골짜기에서 총소리가 나면 여지없이 부역자가 총살을 당하는 것이었다. 벌써 효골에도 당숙과 조카 되는 삼림과 머슴이었던 김오감 종환이가 숨졌다. 부역자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아버지는 벌써 4번이나 위기에서 탈출했다.
문중 어른들이 영호 형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대로 가다 영호도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국군에 입대를 시키자는 결정을 내렸다. 만 19세가 된 영호 형이 정식으로 군에 입대 하는 날, 마을에서는 무운장구 수건을 메고 잔치를 베풀었다. 손자를 전쟁터로 보내는 할머니와 부모님은 또다시 자식을 잃을까 전전긍긍했지만 우선 경찰에 검거되어 죽는 것보다 죽음을 피해 군에 입대하는 게 낫다는 설득에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인해 36년간 억눌렸다가 겨우 해방을 맞이했는데, 이젠 나라가 나뉘어져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세웠고 서로 원수가 되었다.
영호 형은 분단에 이은 전쟁으로 인해 3개월 동안 북한의 인민공화국 의용군이 되었다가 이제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중부전선에 투입이 되었다. 국군 제1사단에 배치돼 지난날 동지였던 인민군과 총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영호 형은 생각했다. 만약 홍 군관 장교가 자신 앞에 나타나 교전을 한다면 의형제를 맺었던 형제요, 자신을 어쩌면 살게 해준 은인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영호 형은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영호 형은 격렬한 전투에서 손목과 발목에서 포탄이 터져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입원했다가 중환자이기에 울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모님은 편지가 뜸하면 아들이 죽었나, 태산 같이 걱정을 했는데,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어머니는 배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이틀 만에 울산병원에서 아들과 상봉했다. 다행히 상처가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상이었기에 전선에 투입 될 수 없어 결국 상이 제대 대상이 되었다.
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밤, 둘째 형인 영호 형이 제대를 하고 돌아오는 꿈을 꾸었었다. 참으로 신통하게 다음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형이 제대군인이 되어 운동장에 나타났다. 나는 형에 품에 안겼다.
살아 돌아온 형으로 인해 집에는 희망과 꿈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아직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휴전 준비를 위한 수차례 회담이 열렸으나, 협상은 쉽게 타결되지 않았다. 문제는 고려의 천년고도 개성이었다.
당초 38선에 개성은 이남이었고 철원은 이북이었으나, 결국 많은 군이 양쪽에서 희생자를 내고 1953년 7월 27에 드디어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문제는 휴전 당사자 정하기였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북의 남침이니, 내란이라며 당사자이기를 포기했다. 결국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은 자국의 군 작전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지난 5월,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이양한다'는 한미 간 합의를 다시 3년 후인 2015년으로 연기했다.
남북 군 수십 만이 죽고 부상당하고 이산가족이 1000만에 이른다. 또한 전쟁 전후로 민간인 학살이 100만에 이르고 보도연맹 희생자도 24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이로 인한 이데올로기로 남북갈등과 남남갈등도 증폭되어 왔다.
맏형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이뤄낸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