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민군이기도 하고 국군이기도 합니다

[윤씨이야기③] 분단조국이 만들어낸 슬픔

등록 2010.10.05 14:29수정 2010.10.0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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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기념 기획-르포기사 공모전> 기타(사는이야기 등) 분야 우수작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주)강제규 필름

의용군으로 간 둘째 영호 형은 전북에서 효골 집을 찾아온 홍 군관 장교와 함께 인민의용군 간부로 있었는데 할 수 없이 북으로 철수를 하고 있었다. 우선 동해 쪽 태백산맥을 넘어야 할 무렵 산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보름달이 나무사이로 스며들었다. 향수에 젖은 홍 군관 동무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는 앞으로의 전쟁 상황을 스스로 읽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군관 장교는 영호 형을 부른다.

"영호 동무! 지금 뭘 그리도 상념에 잠겨 있소?"
"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고향생각이 잠간 떠올라서…."  

"그래요. 아직 성인도 덜된 19살의 소년이 고향 그리운 게 당연하지요."
"죄송합니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아니오. 그게 아니오. 나도 북에 부모 형제들 생각이 절로 나고 있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초가을 풀벌레 소리는 평화로운 가을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지금 쯤 남북의 농촌은 가을걷이를 하고 풍성한 오곡백화를 창고에 쌓아두고 겨울내기를 생각하고 있을 터. 남북이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현상에 몸담고 있는 자신들이 처량했다.

"남북이 통일되는 그날이 오면, 은공 갚는 거요"

영호 형은 평소에 영철 형의 조국통일 운동에 대한 개괄적인 상황은 몰랐지만, 남북이 하나 되는 좋은 세상을 꿈꾸는 형의 정신에 다가가고 있었다. 영호 형은 의용군에 들어가 전쟁의 종식을 원했지만 그것은 당장의 바람이었다. 눈은 좀 붙였지만,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어느새 아침이 되어 태백산맥으로 출발을 해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홍 군관 동무가 정색을 하고 영호 형을 불렀다.


"윤 동지! 밤사이 내래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동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네! 고향으로 가라니요. 제가 이 대열에서 어찌 이탈한단 말입니까?"
"글쎄, 내 명령에 따르시오. 지금 나와 같이 38선을 넘는다고 살아간다는 보장이 없소. 지금 국군과 유엔군이 우리 인민군의 이남병력들이 북으로 넘어가는 걸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 왔소."

"정말 제가 고향으로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렇소, 나만 눈감으면 되는 일이요. 윤 동지 형인 영철 동지가 조국통일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되셨는데 영호 동지까지 조국에 바칠 필요는 없소. 그리고 고향의 할머니와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 하오."


"그러면 군관동무님의 명령대로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잘해 주셨고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이 은공 어찌 갚을지…."
"은공은, 남북이 전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휴전하고 그리고 통일이 되는 그날이 오면 그때가 우리 서로 은공을 갚는 것이요."

"군관 동무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필히 살아남겠습니다. 군관 장교님도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래요. 우리 꼭 살아서 만나요. 그리고 이 세발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오. 나는 산을 타고 가야 하니 오토바이가 필요 없소."

둘은 포옹하고 이별을 고했다. 형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했다. 전주까지는 저항이 없어 순순히 내려갔으나 그 다음부터는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산을 타고 가야 했다. 영호 형은 처음부터 홍 군관 장교가 마치 친형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어느 날 홍 군관 장교가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여 형제처럼 2개월 동안 지낸 것이다. 

인민군 부역 사실을 신고한 아버지와 둘째형

과연 그는 무사히 38선을 넘었을까 신경이 쓰였다. 자신도 아무 탈 없이 고향까지 갈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렇게 한 이틀을 가다가 효골이 아닌 진외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아버지가 있는 것 아닌가. 부자는 서로 얼싸 앉고 이는 하느님의 축복이라며 기뻐했다.

보름동안을 외가에서 지내다가 조금은 조용하다는 효골에 도착했다. 효골 가족들은 인편을 통해 진외가와 소통을 해서 부자가 무사함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뒤엔 식구들 모두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무소식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식구들의 숨통이 이제야 트인 듯했다. 한숨을 돌리고 10월 하순이 되었을 때 마을에 방이 붙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한 사람은 자수를 하라며 한 달 내에 하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경고성 공고였다. 아버지와 영호 형은 자진하여 부역 신고를 했다.

"본인은 살기 위해 부역을 하였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너나없이 줄지어 인민치하에 협조한 사람은 모두기 자수하여 신고했다. 만약에 신고를 누락하면 지역의 그 누가 고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았다. 경고 방에는 '자진 신고를 한 부역자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단서도 있기에 마음 놓고 신고를 했다. 이렇게 신고를 하고 난 후 겨울이 왔다. 그 시기 우리 국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고 평양시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그동안 내가 주장한 북진통일을 이제 이루게 되었다"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민군도 부산 가까이 점령하고 '곧 조국통일 과업을 이룬다'고 했었고, 국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신의주로 향하며 '이제 대한민국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남북의 주장과 판단은 맞아 들어가는가?

그때는 맥아더 유엔사령관이 이 기회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까지 점령하겠다고 하자, 미국본토에서 무모한 작전이라며 맥아더를 해임한 시기였다. 유엔군이 침공 의사를 밝히고 있을 때 수많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잠시 점령했던 평양을 내주고 남으로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이었다. 소위 1.4후퇴가 시작되었다.

의용군이 되었다가 국군으로 중부전선에 투입된 형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주)강제규 필름

흥남부두, 원산부두로 수 십 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피난길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뱃길 또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역전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남쪽의 상황은 복잡하기만 했다. 1948년 여순 사건에 지하 배후자로 지목되어 맏형이 죽어갔던 것처럼 이번에는 부역자를 사전 검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형은 특별 검거대상이 되었다. 수차례 사복형사들의 수사망을 피했다. 마을 뒷산 재각 골짜기에서 총소리가 나면 여지없이 부역자가 총살을 당하는 것이었다. 벌써 효골에도 당숙과 조카 되는 삼림과 머슴이었던 김오감 종환이가 숨졌다. 부역자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아버지는 벌써 4번이나 위기에서 탈출했다.

문중 어른들이 영호 형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대로 가다 영호도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국군에 입대를 시키자는 결정을 내렸다. 만 19세가 된 영호 형이 정식으로 군에 입대 하는 날, 마을에서는 무운장구 수건을 메고 잔치를 베풀었다. 손자를 전쟁터로 보내는 할머니와 부모님은 또다시 자식을 잃을까 전전긍긍했지만 우선 경찰에 검거되어 죽는 것보다 죽음을 피해 군에 입대하는 게 낫다는 설득에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인해 36년간 억눌렸다가 겨우 해방을 맞이했는데, 이젠 나라가 나뉘어져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세웠고 서로 원수가 되었다.

영호 형은 분단에 이은 전쟁으로 인해 3개월 동안 북한의 인민공화국 의용군이 되었다가 이제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중부전선에 투입이 되었다. 국군 제1사단에 배치돼 지난날 동지였던 인민군과 총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영호 형은 생각했다. 만약 홍 군관 장교가 자신 앞에 나타나 교전을 한다면 의형제를 맺었던 형제요, 자신을 어쩌면 살게 해준 은인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영호 형은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

영호 형은 격렬한 전투에서 손목과 발목에서 포탄이 터져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입원했다가 중환자이기에 울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모님은 편지가 뜸하면 아들이 죽었나, 태산 같이 걱정을 했는데,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어머니는 배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이틀 만에 울산병원에서 아들과 상봉했다. 다행히 상처가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상이었기에 전선에 투입 될 수 없어 결국 상이 제대 대상이 되었다.

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밤, 둘째 형인 영호 형이 제대를 하고 돌아오는 꿈을 꾸었었다. 참으로 신통하게 다음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형이 제대군인이 되어 운동장에 나타났다. 나는 형에 품에 안겼다.

살아 돌아온 형으로 인해 집에는 희망과 꿈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아직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휴전 준비를 위한 수차례 회담이 열렸으나, 협상은 쉽게 타결되지 않았다. 문제는 고려의 천년고도 개성이었다.

당초 38선에 개성은 이남이었고 철원은 이북이었으나, 결국 많은 군이 양쪽에서 희생자를 내고 1953년 7월 27에 드디어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문제는 휴전 당사자 정하기였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북의 남침이니, 내란이라며 당사자이기를 포기했다. 결국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은 자국의 군 작전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지난 5월,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이양한다'는 한미 간 합의를 다시 3년 후인 2015년으로 연기했다.

남북 군 수십 만이 죽고 부상당하고 이산가족이 1000만에 이른다. 또한 전쟁 전후로 민간인 학살이 100만에 이르고 보도연맹 희생자도 24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이로 인한 이데올로기로 남북갈등과 남남갈등도 증폭되어 왔다.

맏형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이뤄낸 '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주)강제규 필름

당시 영호 형은 인민군도 되었다가, 국군도 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고 이로 인한 아픔의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형은 상이군인으로 제대하여 한동안 거주지인 광주의 동사무소 군경원호 서기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우연하게도 상경해 한강백사장에서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 선생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연설을 듣고 사직한 뒤 정치에 뛰어 들었다.

영호 형의 꿈은 높았으나 선거에 3번이나 입후보해 낙선했다. 형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자살까지 기도했었다. 80살을 앞둔 노병은 지금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형은 10년 전부터 정치에 대한 야망도 접고 문중 종사 일에 전념하면서 남은 생을 어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 나는 맏형의 억울한 죽음에 따른 과거사법을 제정하는데 앞장 서고 실천에 옮겨 60년 만에 맏형의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도 이뤄냈다. 그렇다고 백만의 억울한 영혼들이 다 진상규명이 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 한해 이루어졌다.

분단 65년을 맞이하고 6·25 전쟁 60년을 맞은 올해, 지난 분단으로 인한 전쟁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과연 84세쯤 됐을 홍 군관 장교의 생사도 궁금하다. 나도 그를 몇 번이고 보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 둘째형의 은인이기도 한 그를 잊을 수가 없다. 결국 맏형과 둘째형의 명예회복은 휴정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평화통일로 가는 그날이 될 것이다. 그 길이 분단으로 생긴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줄 것이다. 

우리 한반도 7천만이 부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의 노래에 부응하는 그날이 오면 우리는 평화와 통일을 이룬 7천만이 될 것이다.
#6.25 #국군 #인민군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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