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일)
꾸지나무골해수욕장에서 맞은 아침, 몸을 씻어야 하는데 민박집 화장실에 샴푸가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성수기 때도 없었는지 궁금하다. 비누가 있기는 한데, 이놈의 비누가 물 먹은 건빵처럼 거무튀튀하다. 몸뚱이 중간 부분에 두 개 구멍이 뚫려 있는 것까지 똑같다. 때를 씻으라는 건지, 때를 묻히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대체 무슨 용도로 쓰던 물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세제 없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다. 씻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침부터 무릎이 뻐근하다. 관절이 부드럽게 구부러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자전거 타는 자세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요 며칠 계속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과한 운동을 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몸에 무리가 오고 있는 건 분명하다. 언덕을 피해 다니든지, 그게 불가능하면 어디서든 쉬어가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쉬어간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직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그땐 또 몸이야 어떻든 자전거부터 타고 보자는 생각이 더 강하다. 어느새 내 몸뚱이마저 자전거 구르듯이 굴러가지 않으면 몇 발자국 못 가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그런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움직이자,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해 보자고 하지만, 결론은 늘 끝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다. 도대체 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도 내 속을 모른다.
4만여 개의 손도장, 국보급
만대땅끝마을을 벗어나는 일은 덜 고생스럽다. 하루 저녁 자고 일어나면서 원기가 되살아난 까닭도 있고, 처음부터 과한 힘을 써서 언덕을 오르려 하지 않는 까닭도 있다. 만대땅끝마을을 벗어나서 이원방조제를 넘으면서부터는 대체로 곧고 평탄한 길이다. 한동안 꽉 막혔던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앞선 길들이 시큼털털한 탁배기를 마시며 달려온 길이라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은 시원하고 달콤한 청량 음료수를 마시며 달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묵은 피로가 가신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참으로 가지각색의 길을 맛보고 있다. 이런 즐거움마저 없다면, 더 이상 이 여행을 지속하기도 힘들다.
이원방조제에 세계 최대 벽화가 있다고 해서 가던 길을 멈췄다. 무엇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그림은 기대 이하다.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벽화 위에 찍힌 4만여 개의 손도장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다. 한 번 보고 말 예술이 아니다. 오래도록 보존해, 수만 명이 이 방조제에 손도장을 찍은 의미를 알게 해야 한다.
2007년 겨울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전례 없이 큰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했다. 검은 기름이 해안을 덮었다. 해수면은 물론, 파도를 타고 온 기름덩어리가 해변까지 오염시켰다. 앞서 몸으로 익혀 알고 있듯이 태안반도처럼 복잡한 해안이 없다. 해안 구석구석 스며든 기름을 제거하는 데 연 인원 12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이 역시 전례 없이 큰 규모의 자원봉사였다. 그들 덕에, 기름때로 절망 상태에 놓여 있던 해안이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원방조제에 손도장을 찍기 시작한 건 그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가며 자원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정신과 의지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벽화에 지금까지 약 4만여 개의 손도장이 찍혔다. 손도장 찍는 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장에 가면, 물감과 손 씻을 물 등을 준비해 놓고 손도장 찍는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주말이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 사실 벽화는 미완성 상태다. 그러니 '벽화가 조악하다'는 말은 사물을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말하는 섣부른 평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