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좀 모자란 숙종의 이미지를 조장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그러나 그 같은 숙종의 이미지가 실제의 이미지와 무관하다는 점은 <숙종실록>을 조금만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와는 전혀 무관한 허구의 이미지가 지난 300년간 한국인들의 관념을 지배해 온 것이다. 오늘날에는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다면, 지난날에는 <사씨남정기> 같은 소설책들이 역사를 왜곡했던 것이다.
<숙종실록>이 편찬된 1728년으로부터 근 30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태까지 실록과 무관한 숙종의 이미지가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좀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사씨남정기>나 <인현왕후전> 등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데에 비해, 실록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에서도 사료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는 학자들도 사료를 이용하는 데에 많은 제약을 안고 있었다. 또 학문적 연구결과가 대중적인 문학작품에 반영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숙종의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의 숙종이 <사씨남정기> 속의 유한림과 너무나 딴판이었다는 점은, 숙종을 가까이에서 접한 사람들이 숙종 사후에 숙종(肅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린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표면상으로도 '엄숙함'의 이미지를 풍기는 숙(肅)자 속에는 훨씬 더 엄숙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경종 즉위년(1720) 6월 15일자 <경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이 죽은 지 7일 뒤에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이란 묘호를 올린 것은 그가 강덕극취(剛德克就)한 군주였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강덕극취란 '강직하고 덕스럽고 이겨내며 나아간다'는 의미다. 숙종을 가까이서 접한 대신들이 모여 숙종의 캐릭터를 이같이 정리한 것은, 그들에게는 숙종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저돌적인 인물로 비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숙종의 이미지 중 하나는 남의 손에 놀아날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숙종에게 붙여진 '숙'자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점은, 궁정의 여인천하와 조정의 붕당정치를 함께 연동시켜 적절히 활용한 그의 노련한 솜씨에서 잘 드러난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책봉했다가(A)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운 뒤에(B) 다시 장희빈을 폐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C) 과정은, 숙종이 서인당과 남인당(이황의 추종세력)을 다루는 과정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서인당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사건 A는 정권이 남인당에서 서인당으로 넘어간 경신대출척(경신환국, 1680년) 직후에 일어났고, 남인당 소속의 장희빈이 중전이 된 사건 B는 정권이 다시 남인당으로 넘어간 기사환국(1689년)과 함께 일어났으며, 인현왕후가 복귀한 사건 C는 정권이 서인당으로 도로 넘어간 갑술옥사(1694년)와 함께 일어났다. 각각의 시점에서, 패배한 여인은 통곡을 했고 패배한 정당은 참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숙종이 중전을 세우거나 폐하는 과정은 집권당을 바꾸는 과정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집권당과 중전이 같은 당파가 되도록 조율했던 것이다. 전근대 정치의 두 축인 궁정과 조정에서 동시에 정권교체가 일어나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중전을 바꾼 것은 여자에게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서 그렇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숙종이 패배한 쪽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살려놓은 뒤에, 승리한 쪽이 너무 강해진다 싶으면 또다시 집권당과 중전을 신속히 교체하는 정치패턴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여인들이든 붕당들이든 간에 상호 신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느 쪽이든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분열시켜 놓은 상태에서 자신의 파워를 강화하는 데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왜 최숙빈을 인현왕후 쪽에 붙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