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리스크 시내의 '4월 참변 추도비'1920년 4월 4일부터 5일까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순국한 240명의 러시아인과 한국인을 추도하고자 세운 비라고 한다(출처; 박환, '러시아 한인 유적답사기' 270쪽).
박도
최재형의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안중근이 거사 전 최재형 집에 머물며 사격연습을 하였다고 했고, 하얼빈 거사 후 아버지 최재형이 안중근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도 물심양면으로 많이 돌봐주었다고 한다. 우수리스크에는 이밖에도 한인독립유적지가 많았다.
우수리스크조씨가 안내하는 대로 일일이 카메라에 담고 취재수첩에 부지런히 기록했으나 이 글들을 여기에 다 옮겨 적기에는 내가 남(다른 학자)의 수고를 가로채는 것 같아 줄인다. 다만 우수리스크 역은 안중근 의사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내려 차표를 산 곳이다.
다음날 내가 열차를 타고 이곳을 들를 테지만 그때는 한밤중이기에 미리 일대를 카메라에 담고자 역을 찾았다. 쌀쌀한 날씨 탓으로 다소 썰렁해 보이는 역 광장에는 빛바랜 레닌의 동상이 우뚝 솟아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인민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그 말을 대학 교양학부 시절 경제원론 강의시간에 듣고 얼마나 놀라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가. 하지만 이 슬로건은 공염불이 된 채 공산사회를 추종하던 나라들은 낙후를 면치 못해 거의 무너져 버렸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들이 대가 없이는 능력에 따라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 같다. 볼셰비키 혁명의 총본산 러시아마저 자본주의에 무너져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지 않는다"는 말처럼 길거리 화장실은 물론, 공공기관 화장실에서조차 돈을 받는 치사한 나라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