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한복을 입은 아들 한결이
문병호
드디어 귀성이다. 남편은 무거운 여행용 가방에 작은 짐 가방 하나 들고, 난 아이를 안은 채 기차에 오른다. KTX로 3시간,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로는 4시간 남짓, 아이가 1시간이라도 자주길 기대하는데 이 아가 가끔 한 숨도 안 자기도 한다. 강적이다. 남편과 내가 돌아가면서 기차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다. 시댁에 도착하기 전부터 벌써 기운이 쫙 빠진다.
워낙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몇 번 내려가지 못하는 시댁. 시부모님은 우리가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셨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론 확실히 반기는 정도가 달라졌다. 아이가 얼마나 컸나 보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요럴 때 맘껏 재롱을 부려주면 점수가 팍팍 오를 텐데 가끔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낯선 아들은 곧잘 안기는 할머니를 넘어 할아버지에게 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선 말문이 트여 조잘대기 시작한 아이를 앞에 두고 반복학습에 돌입했다. "한결이, 우리 내일 뭐 타고 시골 가죠?" 물으면 아이가 "칙칙폭폭 기차"라고 대답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인사하기로 했죠?" 하니 22개월 된 아들, 두 손을 배에 올리고 귀엽게 배꼽인사를 한다. 요대로 시댁에 가서도 해야 할텐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집에만 가면 봉건주의로 회귀하는 남편... 얄밉다, 얄미워여자들이 명절스트레스가 많다고 하던데 그나마 난 편한 편이다. 어머니가 상차림 준비를 거의 끝낸 뒤 도착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 몫은 주로 '전 부치기'다. 가족끼리만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준비하는 음식량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끼니 때마다 돌아오는 설거지는 아직 유일한 며느리인 내 차지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남편은 자기집에만 가면 봉건주의로 회귀한다. 결혼 후 처음 맞은 명절 때, 밥 먹고 설거지 하고 밥 먹고 설거지 하고가 너무 빨리 돌아와 짜증이 팍 나서 남편한테 "이래도 되느냐?"고 따졌더니 "아직 때가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도대체 그 '때'란 건 언제 돌아오는지 결혼 3년이 넘도록 남편은 시댁만 가면 노트북에 다운 받아간 영화나 만화 보고 자다가 밥 먹으라면 밥 먹는 게 다다. 아,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 만난다고 명절 전날 술 마시러 나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만 시댁에 남겨 두고….
그나마 임신했을 땐 슬그머니 와서 설거지도 몇 번 하더니 아이가 태어난 후 다시 '도로남'이 돼버렸다. 뭐, 아버님이 시키시는 농사를 거들기도 하고 애 보는 시늉을 하기도 하지만 시댁에만 가면 '휴식 모드'인 남편이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다. 결혼 전, 명절 때만 되면 소설책과 만화책을 쌓아놓고 지나간 드라마를 탐독했던 나의 달콤했던 연휴는 사라진 채, 남편만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배가 아플 수밖에.
'명절 이혼'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찮게 본다. 객지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웃음꽃을 피워야 할 명절이 결혼생활의 파국을 만들어내는 건 그리 큰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변했음에도 어머니, 아버지, 며느리, 남편 등으로 굳어진 역할들이 서로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불협화음을 내는 게 아닐까. 도덕시험의 모범정답처럼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남편, 이제 '때' 타령 그만하고, 부모님 눈치 보지 말고 '평등명절' 좀 실천해 보시지.
오늘 저녁에도 시어머니는 막내아들 내외와 손자가 잘 오나 기차역을 서성이고 계실 것이다. 아직 완벽하지 않고 바라는 것도 많지만 그래도 명절은 좋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의 정겨운 웃음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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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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