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발길이
내 여린 가슴을 밟고 지나갔는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밟힌 가슴의 상처가 살아난다
오늘은 내가
발자국을 남기며 길을 간다 -'길을 가며' 몇 토막
이 시에서 말하는 길은 우리가 흔히 걸어 다니는 길(도로)이기도 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부처와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살펴보자. 부처는 마야부인이 친정으로 아기를 낳으러 가다가 태기를 느껴 룸비니 동산에 있는 사라수(沙羅樹) 아래에서 낳았다. 그녀는 석가를 낳은 뒤 7일 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 등록을 하러 간 다윗 고향인 베들레헴에 있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물론 예수가 태어난 장소나 예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서로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처와 예수는 다 같이 폭신한 침대가 아닌 길바닥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길' 하면 수행자와 '도'가 떠오르는 것도 아마 이 두 성인이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이번 시집에서 효림 스님은 길을 걸으며 스스로 '길'이 된다. 그 길 위를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다. 오죽 많이 밟혔으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 밟힌 가슴의 상처가 살아난다"고 했을까. 근데, 오늘은 스님이 그 길을 밟고 지나간다.
"나도 지나가고 / 다른 많은 시간이 지난간 뒤에 / 바람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밤이 찾아오면 / 내가 밟고 간 상처 때문에 / 이 길도 잠 못 이룰까"라고 중얼거리며. 이 시에서 길은 곧 도이고, 도가 곧 길이다. 그 도를 찾아 길을 밟고 지나가는 수행자 또한 스스로 길이 된다. 사람들이 수행자를 만나면 마음으로 마구 밟고 다니는 그 길 말이다.
"그대의 배신은 내 마음을 더욱 거룩하게 한다"
불행하게도 천심을 알았으니
나는 아무래도 서러운 사람이다
먹구름이 민심을 덮고
역사가 요동을 칠 때면
내 눈에 끝없이 눈물이 흐른다 -'저항' 몇 토막
효림 스님은 스스로 서러운 사람이라고 여긴다. 왜? 세상이 어지러워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흐르기 때문이다. 스님은 "삶이 고달프고 힘든 것은 그렇다" 치지만 "짓밟히고 뭉개지고 / 배곯아 죽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스스로에게, 옆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물음표를 툭 던진다.
그렇다. 아무리 세월이 어려워도 까닭 없이 사람을 다치게 하면 되겠는가. 식량이 남아도는 데도 사람이 배가 고파 굶어죽게 만들면 되겠는가. 근데, 우리 역사는 그동안 그런 일들이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외침 때문에 혹은 폭정이나 군정 때문에. 지금은 군정이 아닌데도 양극화란 무시무시한 괴물이 사람들을 마구 짓밟고 있다. 마치 아수라장을 보는 것만 같다.
세상이 이렇게 어렵다 보니 "역심이라도 품어봐야지 / 누구 등에 칼이라도 꽂아야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자살, 성폭행, 납치, 테러, 살인 등도 모두 세상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스님은 이 때문에, 이러한 천심을 알았기 때문에 서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알아서 안 될 것을 알았나 보다"라며 서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이 시집 곳곳에 서러움처럼 박혀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 어둠"(무명)이라거나 "우리는 무엇보다 시인이므로 / 이 사람 저 사람의 날카로운 말과 말의 사이 / 그 미묘한 사잇길로 / 아무 상처 입지 말고 지나가자"(사잇길), "그대의 배신은 / 내 마음을 더욱 거룩하게 합니다"(배신), "나는 하나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표적), "날마다 흘리는 눈물로도 / 씻겨지지 않는 피가 어디 있겠나" 등이 그러하다.
그리움으로 빚은 곱고 아름다운 시, 여광주(麗光酒)
햇볕에 그을린 저 바윗돌도
껍질을 벗기면 순결한 속살이 있다
그 속살에는 천둥소리도 들린다
천둥소리에는 도랑물도 흐른다 -'속' 모두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그리움으로 빚은 곱고 아름다운 시, 여광주'란 이름표를 단 해설에서 "언제인가 감동은 너무 커 먹먹한데 도저히 말로선 표현할 수 없는 시를 만났을 때 불현듯'시시주선(詩時酒禪)'이란 말이 찾아들었다"며 "언어도단(言語道斷),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 묘오한 선(禪)적 지경과 그것을 기어코 언어로 표현해내야만 하는 시"라고 평했다.
임효림 세 번째 시집 <그늘도 꽃그늘>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가장 얕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마치 이승과 저승을 잇는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마음 깊숙이 사무친다. "높기는 그중에 푸른 하늘이 가장 높은데 / 그대의 노랫소리 가운데서도 / 높고 고운 소리는 하늘까지 가닿고"(가객)처럼 그렇게.
시인이자 스님(백담사 무금선원 교선사, 봉국사 주지)인 임효림은 1968년 출가를 한 뒤 전국 선원에서 참선수행을 했으며, 6월항쟁을 기점으로 재야시민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때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불교신문사 사장,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공동의장 등을 맡았다.
그 뒤 백담사 회주 오현 큰스님 가르침을 따라 시를 공부하다가 2002년 불교 잡지 <유심> 봄호에 '한 그루 나무올시다' 등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흔들리는 나무> <꽃향기에 취하여>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그 곳에 스님이 있었네>가 있다. 그밖에 <만해 한용운의 풀뿌리 이야기> <사십구재란 무엇인가> <행복으로 가는 기도> <자유로 가는 길 道> 등을 펴냈다. 지금은 성남 봉국사 주지와 백담사 무금선원(無今禪院) 교선사(敎禪師)를 맡고 있다. 전태일 문학상 특별상 받음.
2010.09.14 19:38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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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도 꽃그늘
임효림 지음,
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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