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국경지대한러국경지대의 동해바다로 멀리 북한 산하가 가물거린다.
박도
찬 바닷바람과 짭짤한 바다냄새를 실컷 들이킨 뒤 객실로 돌아왔다. 객실은 혼자이기에 내 침대 구석자리에 놓은 짐들을 다른 침대에 옮겨 놓은 뒤 책을 펼쳤다. 그런데 눈은 자꾸만 유리창 너머 바다로 향했다.
내가 쓰고 있는 객실은 동춘호 오른편이라 배가 북으로 항해하니까 일본 쪽만 바라 보였다. 혹이나 북한 산하가 멀리서나마 보일까 다시 갑판 위에 올랐다. 하지만 동서남북 어디나 바다만 보일 뿐, 언저리를 아무리 살펴도 북녘 땅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보따리 무역상들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동춘호 항로도 공해상으로 더 멀리 나가 항해하기에 북한과는 거리가 더 멀어졌고 항해시간도 한 시간 남짓 더 길어졌다고 했다.
바다만 바라보기도 싫증이 나서 선내 시설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동춘호는 선장(船長, 배의 길이) 132미터에 선폭(船幅, 배의 너비) 23미터 12,000여 톤으로 승객 600명을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이날은 승객이 일백 명 남짓해 보였다. 대부분 여객선이 그러하듯 식당, 매점, 면세점, 전자오락실, 목욕탕 등이 한일페리와 비슷했다. 배가 오래된 탓인지 한일 간을 오가는 카멜리온 호보다 배 안 시설이 훨씬 낡고 칙칙했다.
선상토론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라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스낵코너를 지나는데 속초항 대합실에서 만난 보따리 무역상 여인이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벌떡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앞자리에 앉으라 하였다.
내가 앞자리에 앉자 그는 자기 친구를 소개했다. 친구도 중국 훈춘에 사는데 자기처럼 한국을 오가는 무역상이라고 했다. 그는 어찌나 큰소리로 "이분이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찾아가는 분이다"라고 나를 소개하는지, 건너편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한 부인도 그 말을 듣고는 얼른 우리 자리로 건너 왔다.
세 사람이 모두 오늘이 안중근 의사 거사 100돌인 것을 뉴스를 통해 알았다고 하고는 나에게 집중으로 질문했다. 먼저 남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목회를 한다는 목사님 부인이 물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할 때 몇 살이었습니까?""1879년생으로 그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으니까 만 30세였습니다.""네에!? 겨우 서른 살 청년이 그런 큰 일을 하다니요? 정말 놀랍고 장한 일입니다.""왜 조선이 일본에게 먹혔습니까?""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우리나라 지도층의 부패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도 요즘 뉴스를 보면 고위층의 부패가 판을 치더구만요."세 사람은 내가 대단한 역사학자라도 되는 듯 왜 조선이 망했는지, 일제 35년은 어땠는지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내가 아는 대로 성의껏 답을 하자 그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처 몰랐다는 듯, 내 얘기에 감탄하고는 굳이 커피까지 사다가 대접했다. 그런데 훈춘에 산다는 친구 되는 여자의 질문이 점차 예리해지고 현대사로 옮겨왔다.
국력이 강해지면 자주국이 된다"제가 연변에서 학교 다닐 때 배우기는 남조선은 미제 식민지라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남쪽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보였습니까?""그렇게 보이지 않더구만요.""그게 답입니다. 내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정확한 답은 없지요. 나라도 국력이 강해지면 저절로 자주국이 되고, 개인도 능력이 있으면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마련 아닙니까?"세 여인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말이 많다보면 실언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심하던 차 마침 그때 속초 대합실에서 만난 훈춘 여인이 스낵코너 한 편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일일연속극이 나오자 간밤에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선상 난상토론은 거기서 그쳤다. 다른 두 여인도 뒤따라 텔레비전 쪽으로 자리를 옮기에 나도 객실로 돌아왔다.
배가 계속 북진하는데 바다에도 여객선에도 비바람이 세찼다. 동해 바다의 너울은 허연 혓바닥을 내밀며 삼킬 듯이 여객선에 부딪쳤다. 침대에서 윗몸을 벽에 기댄 채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펴낸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와 <안중근 의사 자서전>, 그리고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나명순 형이 안중근 거사와 순국 현장을 발품을 팔아 쓴 세계일보사 발간 <대한국인 안중근>을 펴들었다.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 생애 전반이 일목요연하게 약술돼 있어 좋았고,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를 깊이 이해하는데 필독서요, 세계일보사 발행 <대한국인 안중근>은 이번 답사여행의 길잡이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고인이 된 나명순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중근 행장(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