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개로도 나비는 난다

[사진] 나비의 날개

등록 2010.09.02 13:34수정 2010.09.0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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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날갯짓의 유혹이 시작된 것은 봄날이 아닌 7월이었습니다. 태양에 녹아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 같은 유리창 바깥쪽에서 팔랑거리는 나비들의 날갯짓은 기어이 내 발을 끌어내 여름의 하오, 잠깐 잠깐 그 더위를 잊게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맨드라미와 흰나비
맨드라미와 흰나비장성희

 배롱나무 가지에 앉은 검은 나비
배롱나무 가지에 앉은 검은 나비장성희

 백일홍과 호랑나비
백일홍과 호랑나비장성희

 히비스커스와 호랑나비
히비스커스 꽃은 내얼굴 두배만하다.
나비의 크기가 짐작되리라
히비스커스와 호랑나비 히비스커스 꽃은 내얼굴 두배만하다. 나비의 크기가 짐작되리라장성희

내 카메라에 가장 먼저 담긴 흰나비는 고요하였고 내가 홀딱 반해 끝까지 따라다니던 검은 나비는 도도하였습니다. 서두름 없던 호랑나비는 우아하였고 왕나비들은 애첩을 끼고 사는 듯 제가 좋아하는 꽃에 들러붙어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내가 끝내 담지 못한 노랑나비들은 쉴 사이 없이 건반과 건반 위를 건너뛰며 아르페지오를 연습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꽃과 풀과 나무와 바람을 짚고 땅과 하늘 사이를 머무름 없이 건너뛰며 나를 조롱하였습니다.

뜻밖에 출현한 수 십 마리의 나비들을 불러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백일홍입니다. 지난해 심은 백일홍이 올해는 꽤 무리를 지어 피어 몇 해 동안 피고 지던 똑같은 꽃들에 싫증이 날 무렵 내게 특별한 선물을 해준 셈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은 가까이 있어도 아득합니다.

하염없이 가볍고 연약해 보이기만 한 저 날개의 궁극적인 목적지도 그저 허공을 떠도는 일이거나 생명을 잇기 위한 가장 단순한 노동의 자리인 내 눈 앞의 꽃과 나무는 아닐 것이라는 인간의 생각은 나비의 가벼운 날개에 과중한 짐을 지웁니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 에서 바다를 건너는 나비와 김규동의 시 <나비와 광장> 에서 아름다운 영토를 향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리는 나비, 박봉우의 시 <나비와 철조망>에서 벽에 부딪혀 피를 흘려도 날아야 하는 나비, 나비들.

그러나 나는 이 여름 한철 나비의 무거운 날개들을 물리고 가벼운 날개에 편승했음을 알립니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 흰 열무 꽃이 파다하다 /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 흰 열무 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 가녀린 발을 딛고 /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 내 열무 밭은 꽃밭이지만 /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문태준의 시 <극빈> 입니다.

열무를 심고 꽃을 바라보는 가난한 시인은 그 꽃마저 나비에게 뺏겼다며 극빈을 읊고 있지만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슬며시 웃었습니다. 채소밭에 꽃을 심어 가난하긴 나도 마찬가지인데 꽃도 내 무릎이요 나비도 내 무릎이니 망중한 뜰에 서서 뜨거운 해와 함께 가까이 있어도 아득한 날개 위에 설핏 드는 선잠도 꿀맛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고마웠습니다. 비로소 날개에 얹힌 시대의 아픔과 '자유'와 '이상', '현실'의 삼중고를 내려놓고 열무 꽃 위에서 나비들을 쉬게 한 시인.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무릎을 내어준 그는 부자입니다.

그러다가 엊그제 찢기고 상한 날개들을 보았습니다. 늘 오던 나비 중 호랑나비와 왕나비 대여섯 마리의 날개가 성치 않았습니다. 한 마리는 아예 날개의 절반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아이들도 8월을 건너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만큼 쉽지 않았나 봅니다. 순간 얼마나 미안해지던지요.

자유를 위해, 생존을 위해 날아야 했던 나비의 날개도 내 것처럼 상처받고 찢어진다는 걸 처음 안 아이처럼. 더 이상 가벼울 수 없는 나비의 날개들이 날고 있습니다. 무거운 날개이나 날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내 작은 뜰을 오가는 길이 저 아이들에게는 김기림의 바다요 김규동의 광장이요 박봉우의 철조망임을 이제야 압니다.

사느라고 어깨가 아픈 당신. 이 한밤 자고 나면 당신의 어깨에도 날개가 돋을 거란 말은 이제 못합니다. 그러나 나비는 숨을 멈추지 않는 한 내일도 그 날갯짓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나비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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