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스캔들>의 4인방. 왼쪽부터 문재신(유아인 분), 이선준, 김윤희, 구용하(송중기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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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험부정이 이루어졌을까? 시험부정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정조 1년(1777) 1월 29일 자 <정조실록>에 언급된 것처럼 정조 임금이 즉위 직후부터 시험부정 타파를 시급한 국정현안으로 설정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 앞에서 커닝페이퍼 돌려봐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을 정시(庭試)라 불렀다. 조교가 감독하는 시험도 만만치 않는데, 하물며 임금이 참관하는 시험이라면 부정행위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영조 25년(1749) 가을에 열린 정시에서는 한 사람의 답안지를 열 명이 돌려가면서 베끼는 부정행위가 발생했다(영조 25년 11월 5일 자 <영조실록>). 물론 똑같이 베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심이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한두 마디라도 자신의 생각을 첨가했을 것이다. 아무튼 임금이 지켜보는 시험에서 답안지를 돌리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과거시험의 권위가 이미 땅바닥으로 추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뒤에 소개될 영조 41년의 사례에 나타난 것처럼, 감독관이 시험 시간을 '너무 충분히' 주다 보니, 한 사람의 답안지를 열 명이 돌려보는 사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사료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어쩌면 시험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임금이 지루해서 자리를 비웠고 그 사이에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임금 역시 사건의 공동책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답안지를 다음날 새벽에 제출해도 된다?수험장에서 눈총을 받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답안지를 너무 빨리 제출하고는 거들먹거리며 수험장을 나가는 바람에 나머지 수험생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사람. 또 하나는 '땡!' 하고 종이 울렸는데도 상체를 숙여 답안지를 가리고는 "딱 1분만 시간을 더 달라!"며 감독관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유형이다. 특정인에게만 시간을 더 주는 것은 시험의 공정성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특정 수험생에게 1~2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음날 새벽까지 기회를 주는 부정행위가 자주 발생했다. 영의정 홍봉한이 영조 임금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밤을 새워 답안지를 작성하는 과거 응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남들 다 돌아간 뒤에 혼자서 밤을 새워 답안지를 쓰다가 새벽에야 겨우 제출하는 것이다(영조 41년 11월 2일자 <영조실록>). 은밀한 불법거래가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특정인에게만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문제지만, 텅 빈 시험장에서 밤새도록 답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부정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영의정이 국왕에게 보고할 정도였으니,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합격자보다 더 유명한 거벽들정조가 시험부정 타파를 천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대리응시자들인 거벽들의 '준동'은 별로 움츠러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벽 활동으로 명성을 얻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봉환·이환룡·이행휘·노긍은 당시의 인기 거벽들이었다(정조 1년 1월 29일 자 <정조실록>).
이들이 학문적 실력을 갖추고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대리응시로 돈을 번 것은 관료 봉급보다 거벽 수입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제도권 안에 들어가기보다는 제도권 밖에 머물려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시스템이 그만큼 낡고 병들어 인기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균관시험 합격자의 절반이 일자무식?영조 말년에 성균관 대사성 홍술해가 주관한 두 차례의 성균관시험에서는 합격자의 절반이 글도 모르고 글씨도 못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홍술해가 사전에 미리 합격자를 정해 놓고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관한 두 차례의 성균관시험은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정조 1년 1월 29일 자 <승정원일기>).
사료에 자세히 설명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홍술해가 주관한 시험은 성균관 유생들을 상대로 한 시험인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성균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는 성균관 유생이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자격시험 같은 것도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합격자의 절반이 일자무식이었을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