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터 정경편안하게 앉아 뭐든 궁금해 하고 추측하고 상상할 수 있어 폐사지는 매력적인 곳으로 존재한다.
김정봉
정인홍은 역사적으로 비뚤어진 평가를 받은 대표적 인물이다(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인조반정 당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았다: 편집자주). 역사적 평가는 승자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묘소를 보고 정인홍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런 우려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가 지난 지 얼마 안돼서 사자에 대한 예우를 저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될 수 있기에 왜곡된 평가를 받는 정인홍의 묘소를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더운 여름, 정인홍 묘소는 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아침 먹기 전에 들른 해인사를 뒤로 한 채 영암사터로 향하는데 비가 내렸다. 라디오 93.1MHZ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월광소나타1악장의 선율에 맞춰 우-두-둑 우-두-둑 내릴 뿐, 비마저도 시원하게 내리지 못하였다. 월광3악장처럼만 내렸어도 응어리진 가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텐데 말이다.
해인사에서 영암사터로 가려면 합천댐이나 합천읍을 거쳐야 한다. 합천댐 길은 댐물이 산허리를 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댐에 갇힌 물이 성을 낼 것만 같아 댐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합천읍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합천읍에서 영암서터까지는 산과 들이 번갈아 있는 한적한 2차선도로다. 영암사터에 가까워지면서 계단식 논이 보이기 시작한다. 밭이 있을 자리인데 논이 있어 눈에 익숙하지는 않다. 산줄기마다 뻗어 내린 계단식 논은 영암사터까지 이어진다. 계단식 논은 화려한 풍광과 다르게 애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계단식 논이 눈에 익을 즈음 황매산 모산재 어귀에 다다른다. 여기부터는 좁은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수탈로부터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을 지킨 마을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차로 좁은 마을길을 통과하기란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산허리에 나이든 느티나무를 보고나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느티나무 옆으로 들어가면 영암사터 옆구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멀리 덕만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산 넘어오기 전에는 절의 옆구리부터 볼 수밖에 없다. 절 앞으로 가자면 새로 지은 절 쪽으로(오른쪽)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절터 정면에 서자, 안개로 황매산 정상은 어렴풋이 보이지만 그 정기는 안개에 젖듯 온몸에 내려앉는다. 몇 단의 거대한 석축 위에 흐릿하게 석탑의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 밭이었던 절 맨아래 부분도 지금은 석축을 쌓아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석축 하나만 봐도 이 절이 예사로운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눈길이 금당터에 이르면 이런 추정은 확신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