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일 행사 사진(1946년)해방 이듬해인 1946년, 충청도 부여에서 있었던 국치일 행사 사진
http://ilovebuyeo.com
하늘은 울었다. <과도정부 조속 실현하자>는 현수막을 뒤로 하고, 연단에 오른 연설자는 해방 이후 불안한 정국에서 조국의 나아갈 방향을 힘주어 외쳤다. 오직 그만이 우산을 썼을 뿐,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말없이 비를 맞았다. 여인들의 윗저고리가 비에 젖어 속살의 윤곽이 드러나고 사내들의 긴장된 부동자세에도 비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오직 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날의 국치일 기념행사는 비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은 엄숙함 속에서 지나갔다. 해방이 되기 전의 국치일은 일본 경찰의 탄압 속에서 어렵사리 지켜야만 했던 날이었으며, 미국이나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만이 그나마 자유롭게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치욕을 되새겼던 날이었다. 그랬기에 조국이 해방되고 첫 돌을 맞이한 국치일에 하늘이 뿌리는 한 맺힌 눈물마저도 이 감격을 모두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국치일을 '국치민욕(國恥民辱)'의 날이라고도 했다. 주권을 빼앗긴 국가의 수치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상처 입었던 수많은 국민들의 치욕도 함께 기억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치욕은 해방의 빛으로 씻기어졌을지라도, 국치로 인한 국민의 상처들은 아직 위로받지 못하고 있었다. 연단 위의 연설자는 이제 국치를 넘어서 해방된 국가의 미래를 건설하자고 역설했지만, 그는 그나마 우산 아래에서 치욕의 빗방울을 피했던 것은 아닐까? 연단 아래의 이름 없는 국민들은 치욕을 막아 줄 변변한 우산 하나 없이, 속절없이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광복절 속에 흡수된 국치의 기억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고 국경일로 삼았다. 국치일은 시대상황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치욕을 기억하고 희망을 염원하는 과제는 이제 광복절에 맡겨졌다.
국치일이 광복절로 계승되었다 할지라도, 두 이름이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다. 치욕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향하지만, 희망을 바라보는 눈은 미래를 향해 간다. 그런 까닭에 매년마다 발표되는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선진 조국 건설'을 강조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1965년의 한일회담에서 유·무상의 차관을 지원받는 대가로 일제의 만행에 면죄부를 준 것도 치욕이 남긴 상처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이 모든 치욕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비록 주권이 있다 할지라도 가진 것 없는 국가의 모습은 여전히 부끄러운 것이었다. 잘 사는 나라, 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모든 관심과 역량은 국가의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것에만 집중되었다. 국민의 아픔과 치욕(민욕)은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나라가 조금씩 잘 살고 부강해져 갈 때에도 우리 정부는 종군위안부나 강제징용자, 그리고 재일교포를 비롯한 해외교포들의 아픔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언론 또한 광복절이 해결해 주지 못했던 치욕과 아픔의 역사를 계속 기억하는 것에 인색했다. 광복절이 제정된 마당에 매년마다 국치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무리라 할지라도 최소한 10년 단위로는 그 아픔들을 기억하고 쓰다듬어야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때마다 일어난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이 이마저도 어렵게 만들었다.
광복을 맞이한 후, 처음으로 국치일의 10주기에 해당하는 해는 1950년이었다. 국치 40년이자, 광복절 제정 이후 첫 국경일 행사를 치러야 할 이 해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현재의 아픔마저 돌볼 틈이 없는 상황에서 과거를 되새길 공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국치 50년이 되는 1960년의 국치일에는 4·19혁명 이후 집권한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권력투쟁이 언론의 주된 관심사였을 뿐, 국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