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1 ‘파사이사금 본기’ 파사이사금 23년 기사. 붉은 수직선 왼쪽이 본문에 인용되었다.
삼국사기
신라의 두 소국인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이 신라 국왕이 아닌 가야 국왕에 의해 해결됐으며 이 문제가 해결된 뒤에 가야 국왕이 무례한 신라 한기부 장관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위의 사료를 해설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점들이 있다.
서기 42년에 등극한 김수로가 서기 102년에도 여전히 금관가야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었다는 위의 기술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가락국기>를 포함해서 고려시대에 나온 가야사 사료들에는, 42년부터 532년까지 490년간 존속한 금관가야에 단 10명의 국왕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가야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가야 국왕들에 대한 정보가 대거 누락되는 한편, 국왕 두세 명의 역사가 국왕 한 명의 역사로 압축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당시의 금관가야 국왕이 김수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금관국 김수로'라는 표현을 '금관가야 국왕'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한편, 위의 사료에 나타난 신라 정부 시스템을 근거로 이 사건이 서기 102년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주장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숨길 수 없는 화려한 역사를 가진 '가야'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위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금관가야 국왕은 신라 내부의 소국들 간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한 뒤에, 자신의 비위를 건드린 한기부 장관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파사이사금 23년 이전과 이후의 기록을 보면, 양국이 오랫동안 상호 대립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나라가 계속 싸웠다는 기사들 속에 위와 같이 금관가야 국왕이 신라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포함되어 있기에 더욱 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일국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면 양국관계는 기본적으로 전쟁관계가 아닌 평화관계가 되어야 하고 또 평화관계 중에서도 '수직적 평화관계' 혹은 '종속적 평화관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적대국인 가야가 신라의 내정에 간섭한 이 사건을 두고, 1980년에 작고한 역사학자 문정창은 <가야사> 97쪽에서 "그런 적국의 주(主, 임금)를 모셔다가 이토록 내정간섭적인 권한을 행세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이 연대에 신라가 가락국(가야국)의 속국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정창의 주장은, 간략히 말해, 당시의 신라가 가야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속국(屬國)은 서양의 종속국(vassal state)과 달리 상국(上國)의 법률을 따르지 않았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칙상으로 자체적인 정치적 자율성을 향유했다. 다만, 국제관계에서 상국과 보조를 맞추고, 상국의 연호를 따르고 책봉을 받으며 일정한 봉건적 예법을 갖추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실질적인 자율성을 향유하되 형식적인 복종만큼은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 건국 이래 확립된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가야가 신라 내부의 분쟁에 개입한 이 사건은 상국-속국 관계 같은 수직적 평화관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위의 사료에는 파사이사금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금관가야 국왕을 불러 물어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 있다 하여 적대국 군주를 '일부러' 모셔서 사법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속국 군주인 파사이사금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상국 군주인 금관가야 국왕이 보다 못해 직접 개입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다만,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삼국사기> 편찬자들로서는 그런 실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숨길 수도 없으므로, 위와 같이 신라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금관가야 국왕을 '불러 물어보았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기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이치적이다. 이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역사를 가야가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년 사이 가뭄·우박·지진 피해를 받은 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