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 없는 인생(浮生)부질없는 인생 한줄기 연기에 날려볼까?
박성희
인형에 혼(魂)을 불어넣는 일이 가능할까?"내 작품이 다른 사람들 작품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죠. 보통 닥종이 인형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오동통한 볼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착한 엄마와 아빠 인형이었고 실제 작품들도 그런 이미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물론 제 작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내가 다짐한 것은 100% 닥종이만 쓴다. 작품에 혼을 불어 넣겠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결심은 의지대로 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는 쉽지 않았어요."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마치 조물주가 흙으로 만든 자기의 형상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을 창조했듯이 종이인형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때부터 그의 모델은 노인들에게 집중된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한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표정에서 삶의 궤적을 찾아 작품으로 이입시켜 인형에 혼을 불어넣기로 작정했다.
깊게 패인 주름, 검게 그을린 얼굴, 저승사자라는 검버섯, 빠진 이로 합죽이가 되어버린 입과 주름진 입술, 두 줄기로 튀어나온 새로 멱주름, 새하얀 머리칼, 투박한 손과 발, 남루하고 해진 옷가지, 심지어 고무신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노인의 표정과 의상에 관련된 것들이라면 모든 것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눈동자가 없다. 비록 눈동자가 없지만 세월을 따라 깊이깊이 몸 속으로 들어가 버린 움푹 패어진 인형들의 두 눈에서는 처연함이 뚝뚝 떨어진다. 평범하게 사는 이웃 어른들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형상이 머릿속에 각인되면 작업에 들어갔다.
모델은 자기 자신이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표정을 작품 속의 이미지와 오버랩 시켜 나갔다. 몇 끼씩 밥을 거르면서도 한 잔의 커피에 의존하며 한 가닥 철사에 수 천 겹의 닥종이를 붙이고 또 붙이며 밤샘작업을 해나갔다. 머리카락을 만들 때는 닥종이로 떡칠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닥나무 껍질을 한 올씩 가발 만들 듯이 심어서 완성했다.
닥종이 인형은 닥종이만을 붙여서 되는 것은 아니다. 염색도 필수 과정이다. 오동통한 어린이 인형이야 원색으로 채색된 종이를 사서 쓰면 그만이지만 구겨지고 색 바랜 낡은 사진첩 속의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의 염색기법이 필요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채도 낮은 색을 즐겨 쓰는 그만의 염색기법이 탄생 했다.
그 염색 기법 덕분에 구김살 진 베옷의 자연스러움까지 리얼하게 표현 할 수 있게 됐다. 박성희 작품의 색감은 마치 몇 년을 항아리에서 곰삭은 젓갈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밥으로 치면 방짜그릇에 화려한색의 갖은 나물을 얹고 새빨간 고추장을 넣어 비빈 비빔밥이 아니라 바가지에 담은 보리밥에 시어 꼬부라진 희끄무레한 열무김치와 강된장을 넣어 비비적거린 비빔밥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