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평화통일' 하시겠다구요?

6·15선언과 10·4 합의 정신이라면 믿어드리지요

등록 2010.08.16 15:45수정 2010.08.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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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뜬금없이 "통일은 반드시 온다"며 통일세를 걷어야 한다고 주장한 대통령 발언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마치 남의 빈소에서 밤새 통곡한 사람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그런데 이 댁에 누가 돌아가셨나 봐요?"라고 말한 것만큼이나 어이없다.

 

해방 이후 참혹한 동족상잔을 거치고 남과 북이 증오로 대립으로만 치닫던 지난 수십 년간의 냉전구도를 완화시키고 평화통일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우리 겨레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그리고 철책으로 가로막힌 휴전선을 넘어 뱃길과 철길을 열기 위해 또 얼마나 애써 왔던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지도 모르는 통일의 그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또, 얼마나 호소했던가?

 

평화 통일을 위한 지난한 노력과 간절한 염원 끝에 얻은 작은 결실들, 그러니까 냉전의 벽을 소떼가 넘고 금강산 뱃길을 열고 비무장 지대에 지뢰를 제거하며 철길을 열은 것을, 당신들은 친북 좌파의 굴욕적인 퍼주기라고 비난한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의 아쉬움은 차치하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산가족 상봉의 길까지 막았고, 함정과 전투기를 동원해 무력시위를 벌였던 것도 며칠 전이다.

 

통일은 마음을 열어야 이루어진다

 

그러하기에 대통령이 제시한 남북이 평화공동체에서 경제공동체로 거기서 다시 민족공동체로 발전해나가야 한다는 3단계 통일론이 얼마나 진지한 숙고 끝에 나온 방안이며 단 일 푼이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적금을 들듯이 세금을 거둬 적립해야 한다는 발상을 접하는 순간엔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포용 정책은 통일 비용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감내해야 했던 독일의 통일 과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현실에 가장 적합하고 실현 가능한 통일 방안을 캠브리지 등에서 오랜 기간 연구하고 토론하고 고심한 끝에 정립 제시된 정책이다.

 

대북 포용 정책은 민족의 화해와 동질성 회복이라는 철학적 측면과 폐쇄된 북한을 국제 사회로 이끌어 개방을 촉진하고 북한 체제를 연착륙시키는 정치적 측면과 통일 전까지 낙후된 북한 경제를 발전시켜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를 줄임으로써 통일 비용을 최소화하자는 경제적 측면 등 다각적인 분야에서 오랜 기간 성찰한 끝에 추진됐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들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단절과 대립의 시기가 길었던 만큼 남과 북이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긴 것이 당연하다. 제대로 됐다면 지금쯤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5년간을 밀고 당기며 어렵사리 연결 개통한 경의선 철길을 통해 중국, 러시아, 유럽 쪽으로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을 실은 열차가 시범적으로라도 운영됐어야 정상이다.

 

길이 열리고 왕래가 잦아지면 마음도 열리고 체제도 열리기 마련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에게 방송으로 유인물로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천번 만번 설명하는 것 보다 그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중국의 오늘을 보라. 중국의 죽의 장막을 열게 만든 것은 거대한 항공모함도 첨단 전투기도 아니었다. 불과 2.7g에 불과한 작은 탁구공 하나가 견고하기만 했던 장막의 빗장을 열었던 것이다. '햇볕이야말로 움츠린 사람의 옷을 벗기는데 어떤 강한 바람보다 위력적이다'는 말이 그렇게 허투로 들렸었는가?

 

평화통일은 우리 혼자의 마음으로 정하고 스케줄을 잡는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고 그들이 진심으로 동의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6·15선언과 10·4 합의 정신이라면 믿어드리지요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이나 이 기조를 계승한 김정일 노무현 대통령의 10·4 합의는 통일을 향해 느리지만 남과 북이 한 걸음씩 서로를 향해 다가서고 있는 조심스런 과정이었다.

 

이 모든 노력을 허사로 돌리고 평화 통일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대통령의 입에서 덜컥 통일에 대비하여 돈부터 모으자는 말이 나오니 기가 막힌다. 지난 수십 년간 정부는 담배에 교육세를 부과해 천문학적 액수의 세금을 거둬들였었다. 유가가 폭등할 때 유가 안정 기금으로 적립하겠다며 세율을 인상했었다. 그 세금들 대부분이 교육에도 유가안정에도 사용되지 않고 전용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발언의 진정성에 많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평화 통일을 원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일말의 진심이라도 담겨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잃은 길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처음 길을 잘못 찾아들었다고 생각했던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대통령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 출발점은 남북 정상이 두 차례 얼굴을 맞대고 합의 서명한 6·15 선언과 10·4 합의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대통령 발언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과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8.16 15:45ⓒ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과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통일세 #대통령 경축사 #6.15 남북공동선언 #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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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음악 오디오 사진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다양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 억압은 절대 못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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