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을' 동생아, 붙을 거 같냐?

수능을 100일 앞둔 고3 동생에게 쓰는 낯간지런 편지

등록 2010.08.09 18:17수정 2010.08.0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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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안녕? 누나야. 오글거리게시리 새삼 웬 편지냐고? 바야흐로 수능이 100일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니. 착한 누나가 동생을 위해 이 정도는 써 줄 수 있지, 뭐. 처음이자 마지막(어렸을 때 싸우고 나서 억지로 쓴 화해편지 이후로 처음인 거 같네)이 될지도 모를 편지니까 잘 새겨 읽기 바라. 뭐, 혹시 재수하면 또 써 줄게(ㅋㅋ). 그런데 교과과정이 바뀌어서 너희 학년은 어차피 재수도 못 한다며?


교실 곳곳 돌던 '롤링 페이퍼'... 선생님은 '악습'이라셨지

응원 "수능대박 참 쉽~죠잉"
응원"수능대박 참 쉽~죠잉" 박병춘

사실 이렇게 수능이라든지 큰 이벤트를 앞두면 꼭 '롤링 페이퍼'를 주고 받곤 하잖아. 남고라 좀 뻣뻣하긴 하겠지만 너희 학교도 이런 거 하지? 나 고등학교 땐 수능 100일 전 선배들에게 뿐아니라, 신입생 후배들 받을 때도 향우회별로 미리 페이퍼를 준비해서 전해 주곤 했어.

심지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전에도 초콜릿에 쪽지를 써붙여 나누고 그랬는데, 향우회 규모가 크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는 애들은 워낙 쓸 양이 많으니까 수업 시간에도 몰래몰래 돌리곤 했지. 한 국어 선생님은 그 '장문의 격문'이 '악습'이라며 무지 싫어하기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런 거 누가 처음 시작했나 희한해. 그래도 받을 때 기분은 좀 좋았던 거 같아. 사기 진작이 된달까? 그래서, 너 사기 진작 되라고 내가 이거 쓰는 건가봐.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이왕이면 시험 잘 보라고.

3년 전 너도 이렇게 배알이 꼴렸겠지


아무튼 내가 요즘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야. 엄마고 아빠고 '고3님' 모시기 바빠서 난 그저 찬밥도 못 되는 말라빠진 밥풀떼기 신세라고. 수험생이 왕인 나라 아니냐. 2주에 한 번씩 네가 기숙사에서 나오는 날에야 겨우 고기 반찬을 구경할 수 있지. 평소엔? 에휴. 자취하던 친구들 집에 내려오면 살 쪄서 간다는데 난 휴학한 뒤로 한 5킬로그램 빠졌다. 다이어트가 따로 없어.

엄마는 만날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원래 엄마가 널 좀 편애하긴 하지만 고삼이라고 아주 올인이야. 난 뭐 남의 딸인가? 그렇게 엄마한테 떽떽거리다가도, 사실 내 고삼 때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져. 개구리 됐다고 잠시 잊은 올챙이적 시절, 나도 고3 땐 그랬으니까.


지금 너처럼 나 역시 기숙사 학교에 다니면서, 차로 30분 이상 족히 걸리는 학교까지 엄마 아빠를 오라 가라 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고3' 노릇을 하고 있었지. 하필 그때 외할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셔서(결국 수능 100일도 안 남기고 돌아가셨잖니) 엄마가 양쪽으로 참 힘들어했어. 그때에 비해 요즘 엄마는 고삼바라지 하면서도 별로 힘들어하는 거 같진 않네. 네가 공부를 썩 잘 한다는 얘기가 들려서, 마음이 즐거워서일까.

사실 내가 고3일 땐 너도 나름 방황 많은 사춘기 중3 수험생이었는데 말야. 유치원 때부터 살던 동네를 뒤로 하고 생판 모르는 시(市)의 기숙사 학교에 갇혀 들어가기 싫어서 가출도 하고 그랬지?(ㅋㅋ) 그때 엄마가 너한테 많이 미안해 했던 거 같아.

기숙사 들어가 있는 나 때문에 정작 집 안에 같이 사는 아들을 못 챙겨서. 하지만 너와 내가 정 반대의 상황이 된 요즘 엄마는 나한테 미안해하기는커녕 뭐라도 챙겨 주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긴 해.(ㅠ_ㅠ) 그러니까 결국 내가 손해지만, 서로 재수 없이 한 번씩 수험 생활 치렀으니 쌤쌤으로 퉁 치자고. 아직 백 일 남긴 했지만, '재수 없을' 거잖아?

육사 시험 친 동생... 야, 붙겠냐?

 12일 오전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뤄지는 종로구 풍문여고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입실해서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12일 오전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뤄지는 종로구 풍문여고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입실해서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권우성

지난주에는 사관학교 시험 치러 간다더니, 잘 봤는지 모르겠다. 군인이고 경찰이고 아무튼 공권력이랑은 영 안 친한 난 네가 시험 치는 걸 반대했지. 하지만 엄마는 '우리 아들'은 당연히 붙는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선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는 길이 최고라 하고, 아빠는 네가 군을 개혁할 거라는 둥 온갖 뜬구름을 잡고 있었고. 정작 너는 그냥 한 번 쳐보는 것 뿐이라며 아빠가 사다 준 사관학교 기출문제집도 한 장 들춰보지 않았지. 야, 그래 가지고 붙겠냐?

붙든 떨어지든, 사관학교를 가든 다른 대학을 가든 모든 건 너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걸 기억해. 처음에 난 네가 사관학교를 가면 재미 없을 거 같아서 잘 구슬려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 보내야지 생각했었는데 나중에는 '어차피 네 인생인 걸' 싶더라. 내가 대신 살아줄 거 아니고 등록금 내줄 것도 아닌데 뭘. 내가 정보나 조언은 줄 수 있어도 결국 결정은 네가 해야 후회도 없고 원망도 없어.

나 역시, 아빠가 반대한 그 고등학교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내 선택이라 후회가 없다. 아마 아빠 말대로 동네 고등학교에서 편하게 공부하다가 유리한 전형 골라서 쉽게 대학 갔으면 더 좋은 학교, 아니 '배치표상 커트라인이 더 높은 학교'라고 하자. 아무튼 그런 학교에 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대학을 더 잘 갔다 해도 아쉬움은 오히려 많았을 거야. 대학 입학 한다고 게임 끝나는 게 정말 아니거든. '그 때 아빠 반대를 무릅쓰고 그 고등학교를 갔다면 좀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하면서 괜히 원망만 하게 됐을 수도 있지. 내 맘대로 결정해버린 후에는, 만약 잘 안 된다 해도 탓할 사람도 없고, 내 결정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게 되더라고. 결과적으로도 난 다 잘 된 거라고 생각해. 애초에 원한 대학이 아니었어도, 지금 내가 만족하니까. 내가 잘 됐다고 생각하면 다 잘 된 거지, 안 그래?

행복은 성적순 아니라는 진리... 그러나 대학은 성적순?!

사실 너에게 진짜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수능 잘 보라는 덕담이 아냐.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대한민국 청소년 1인인 너에게 수능 100일 앞두고 적성과 희망진로를 먼저 찾아내라는 둥, 막상 대학 와보니 학벌이 다가 아니더라는 둥, 대학 따위 안 가면 뭐 어떻겠냐는 둥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아봤자 소용없을테지. 당장 눈앞에 닥친 목표를 향해 매진하기에도 정신이 없을 텐데,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지금 그런 성찰들을 할 여유는 없을 걸 알아. 머리만 복잡하고, 답도 나오지 않겠지.

고등학교 때 강의를 들었던 한 EBS 강사가 그런 얘기를 했어. "여러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성적순입니다." 지금 너의 목표는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보다는 백 일 남았다고 달력에 D-DAY 표시해놓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 거야.

꿈 많고 고민 많고,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사색을 해야 할 청소년들을 오로지 '학벌'이라는 사상누각으로 돌진하게 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잠시 접어 둘게. 오늘 너에게는 오로지 응원만을 주고 싶다. 3년 간, 어쩌면 십이 년 간 준비해온 기량을 후회 없이 발산해야 할 수능이 딱 100일 남았다. 지난 번에 장염에 걸렸다고 하던데, 음식 조심하고.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더라도 다리 안 부러지게 조심해야 하는 게 고3이야.

나는 수능 백 일 전까지 공부 잘만 하다가, 너무 긴장해선지 계속 체하고 몸이 아파 고생을 했었지. 체력이 안 되면 정신력? 다 헛소리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니까. 체력 관리 잘 해라. 이 시기의 중요성은 나 아니라도 말해 줄 사람 많을 거고, 잘 알리라 믿는다. 너는 체력도 정신력도 약해 빌빌대던 나와는 다른 거 같으니 걱정은 안 해. 아, 그리고 수능대박은 공부만 죽어라 판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덕'을 쌓아야 된대. 길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라도 줍고 다니렴. 그럼, 오늘도 열공!
#수능대박 #수능백일 #D-100 #고삼 #재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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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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