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뤄지는 종로구 풍문여고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입실해서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권우성
지난주에는 사관학교 시험 치러 간다더니, 잘 봤는지 모르겠다. 군인이고 경찰이고 아무튼 공권력이랑은 영 안 친한 난 네가 시험 치는 걸 반대했지. 하지만 엄마는 '우리 아들'은 당연히 붙는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선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는 길이 최고라 하고, 아빠는 네가 군을 개혁할 거라는 둥 온갖 뜬구름을 잡고 있었고. 정작 너는 그냥 한 번 쳐보는 것 뿐이라며 아빠가 사다 준 사관학교 기출문제집도 한 장 들춰보지 않았지. 야, 그래 가지고 붙겠냐?
붙든 떨어지든, 사관학교를 가든 다른 대학을 가든 모든 건 너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걸 기억해. 처음에 난 네가 사관학교를 가면 재미 없을 거 같아서 잘 구슬려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 보내야지 생각했었는데 나중에는 '어차피 네 인생인 걸' 싶더라. 내가 대신 살아줄 거 아니고 등록금 내줄 것도 아닌데 뭘. 내가 정보나 조언은 줄 수 있어도 결국 결정은 네가 해야 후회도 없고 원망도 없어.
나 역시, 아빠가 반대한 그 고등학교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내 선택이라 후회가 없다. 아마 아빠 말대로 동네 고등학교에서 편하게 공부하다가 유리한 전형 골라서 쉽게 대학 갔으면 더 좋은 학교, 아니 '배치표상 커트라인이 더 높은 학교'라고 하자. 아무튼 그런 학교에 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대학을 더 잘 갔다 해도 아쉬움은 오히려 많았을 거야. 대학 입학 한다고 게임 끝나는 게 정말 아니거든. '그 때 아빠 반대를 무릅쓰고 그 고등학교를 갔다면 좀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하면서 괜히 원망만 하게 됐을 수도 있지. 내 맘대로 결정해버린 후에는, 만약 잘 안 된다 해도 탓할 사람도 없고, 내 결정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게 되더라고. 결과적으로도 난 다 잘 된 거라고 생각해. 애초에 원한 대학이 아니었어도, 지금 내가 만족하니까. 내가 잘 됐다고 생각하면 다 잘 된 거지, 안 그래?
행복은 성적순 아니라는 진리... 그러나 대학은 성적순?!사실 너에게 진짜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수능 잘 보라는 덕담이 아냐.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대한민국 청소년 1인인 너에게 수능 100일 앞두고 적성과 희망진로를 먼저 찾아내라는 둥, 막상 대학 와보니 학벌이 다가 아니더라는 둥, 대학 따위 안 가면 뭐 어떻겠냐는 둥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아봤자 소용없을테지. 당장 눈앞에 닥친 목표를 향해 매진하기에도 정신이 없을 텐데,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지금 그런 성찰들을 할 여유는 없을 걸 알아. 머리만 복잡하고, 답도 나오지 않겠지.
고등학교 때 강의를 들었던 한 EBS 강사가 그런 얘기를 했어.
"여러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성적순입니다." 지금 너의 목표는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보다는 백 일 남았다고 달력에 D-DAY 표시해놓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 거야.
꿈 많고 고민 많고,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사색을 해야 할 청소년들을 오로지 '학벌'이라는 사상누각으로 돌진하게 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잠시 접어 둘게. 오늘 너에게는 오로지 응원만을 주고 싶다. 3년 간, 어쩌면 십이 년 간 준비해온 기량을 후회 없이 발산해야 할 수능이 딱 100일 남았다. 지난 번에 장염에 걸렸다고 하던데, 음식 조심하고.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더라도 다리 안 부러지게 조심해야 하는 게 고3이야.
나는 수능 백 일 전까지 공부 잘만 하다가, 너무 긴장해선지 계속 체하고 몸이 아파 고생을 했었지. 체력이 안 되면 정신력? 다 헛소리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니까. 체력 관리 잘 해라. 이 시기의 중요성은 나 아니라도 말해 줄 사람 많을 거고, 잘 알리라 믿는다. 너는 체력도 정신력도 약해 빌빌대던 나와는 다른 거 같으니 걱정은 안 해. 아, 그리고 수능대박은 공부만 죽어라 판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덕'을 쌓아야 된대. 길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라도 줍고 다니렴. 그럼, 오늘도 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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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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