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은 보면 볼수록 왜 그리도 뭔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 것일까.
김수복
같은 보라색 계통인데도 어쩐지 보라색 같지가 않은 도라지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어린 시절의 석탄댁이 생각난다. 그녀는 뭐랄까, 전형적인 농촌 사람이기보다는 노천명의 어떤 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의 느낌이 있었다. 눈 뜨면 보이는 것이 흙이요 온종일 손에 만지는 것 역시 흙인 농촌에 살면서도 내 땅이라 할 만한 흙은 한줌도 갖지 못했던 여인이었다.
어디를 가건 항상 남의 땅을 밟아야 했던, 자기 땅에는 한 번도 발을 들여보지 못한 그 여인에게도 분명 남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산에서 소나무 몇 개 베어다가 기둥을 세우고 짚 몇 단 얻어다가 지붕을 덮으면 집이 되는 시절의 농촌에서 그런 집마저도 없이 남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다섯인가 여섯 식구가 구들구들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나마도 정지방이라 해서 지금 생각하면 일곱 자에 일곱 자, 그러니까 대략 2미터 10센티 정도의 정사각형 방이었다. 평수로 치자면 한 평 반은 넘고 두 평은 채 안 된다. 그런 방에서 다서여섯 식구가 어떻게 살았는가는 지금 생각하면 경이롭기만 하다.
그 정지방은 사실 내 방이었다. 절간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외손주들을 보러 오셨다가 한잠씩 주무시는 방이기도 했다. 그런 방을 아버지가 왜 석탄댁 가족에게 내주었는가는 지금도 의문이다. 어쨌든 그녀의 가족은 그렇게 내 방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우리 집에 세를 들어 일 년쯤 살다가 나갔다.
그녀는 산도라지 캐는 일과 남의 집 품팔이를 교대로 했다. 어떤 일이 본업이고 어떤 게 부업이었는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녀는 날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당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에 그녀가 남의 일을 하고 받아오는 것은 그날 어떤 일을 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감자 캐는 일을 하면 감자를 받아오고 보리밭 메는 일을 하면 보리쌀을 받아왔다.
산도라지를 캐는 날이 아마 그녀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날이었을 것이다. 가끔은 마을의 누군가에게 주고 곡식을 받기도 했지만 대개 장으로 가서 팔고 돈을 받아왔다. 그 돈으로 아이들의 양말도 사고 옷도 사고 공책 같은 것들도 사 주었을 것이다.
봄에 진달래나 원추리꽃을 꺾는다고 산에 가면 더러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다. 만났다기보다는 발견했다는 표현이 아마 옳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우거진 수풀 속을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재게재게 걷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작은 망태가 마치 바람벽의 못에 걸어놓은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끝이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창이 들려 있었다. 걷다가 도라지를 발견하면 잠깐 허리를 숙여 도라지를 캐고 다시 일어서서 또 걸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슬픈 사슴'처럼 말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이 부산스럽다거나 자발스럽지도 않았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이들 역시 말이 없었다.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작은 방에 고물고물 있고 보면 더러 싸우기도 하고 우는 소리가 나기도 할 텐데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 가운데 큰애 이름이 대호였던가, 그렇게 기억된다. 그렇게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있다가 일 년쯤 뒤에 이사를 간 그들 가족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다만 없어졌던 내 방이 다시 생겼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십여 년쯤 뒤에 우연히 그들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댁의 큰아들 대호가 이리(현재의 익산)의 무슨 고등학교에서 배구선수를 하는데 전국체전 전북 대표로 뛰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내 귀에까지 들어왔는가는 지금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도라지꽃이 피는 계절이면 그들 가족을 가끔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