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 곤명호에는 연꽃이 피었다.
전용호
이화원은 처음 청의원(淸漪園)이었는데,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때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광서 14년(1888)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재건하면서,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다.
이화원 재건 때문에 청나라가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태후가 해군 군함을 만들 군비를 이화원 재건에 전용하자 많은 비난이 일었다. 서태후는 이화원이 해군 훈련을 위한 장소라고 했다나. 후일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해군 군함이 바다에 나가지 못해서 일본에 졌다는 말이 있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별장서태후가 이화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이었다. 서태후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서태후는 만주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북경으로 이사해서 17살에 궁에 들어간다. 당시 궁녀들은 3년에 한 번씩 물갈이를 하는데,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하면 출궁을 하게 된다. 황실 정원인 원명원에 있던 서태후는 내시에게 있는 돈을 다 줄 테니 기회를 달라고 했고, 내시는 3일 뒤에 황제가 오니 능력껏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 한다.
3일 뒤 황제가 원명원을 방문하게 되고, 서태후는 호숫가에 앉아 비파를 치며 유일한 재주인 노래를 불렀다. 황제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서태후에 호감을 갖게 되고, 아들을 낳으면 황후대접을 해준다는 약속을 받는다. 서태후는 약속대로 아들을 낳게 되고, 기존 황후는 동태후가 되었다.
황제가 죽자 9살 아들이 황제를 물려받고 서태후는 섭정을 하게 되면서 무한 권력을 갖게 된다. 이후 서태후는 남편이 없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화원에서 일상을 보내게 되고, 북경에 잘생긴 남자들을 잡아와서 즐기고 없애버렸다고 하니, 북경에 잘생긴 남자는 씨가 말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