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유탁이 관군과 일합을 겨루었던 곳
이정근
유탁이 칼을 뽑았다. 관군을 겨냥한 칼끝이 햇빛에 번쩍였다. 그 빛이 반사되어 유탁의 눈동자가 섬광처럼 빛났다. 살기(殺氣)다. 내가 살기위하여 상대를 죽이려는 기(氣)다. 그러나 기를 가지고 수십 명의 군졸을 상대하기엔 벅차다.
"칼을 버려라."
별장이 소리 쳤다. 유탁이 칼을 좌우로 겨누면서 허리를 구부렸다. 뛰어오를 자세다. 오른쪽에 한길이 넘는 바위가 있다. 바위에 오르면 상대적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 마을 쪽으로 튈 수 있다.
"칼을 버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별장이 호통 쳤다. 참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입에 붙은 회유일수도 있다. 허나, 유탁은 그 어느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 살아야겠다는 일념만이 그를 지배했다. 어떻게 모은 산채꾼들인가? 의(義)를 세워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일어선 자신이 아닌가? 권대식과 지장골 계곡에서 의기투합하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민초들이 우매하다고? '백성들이 바보 곰탱이가 아니다'"나라를 도적질한 임금, 성공한 반란은 용서될 수 있다고? 그래서 반정이라고? 가당치않은 소리들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흰 것은 흰 것이다. 호도하려 들지 마라. 너희들이 생각한 것만큼 민초들이 우매하지 않다. 백성들이 바보 곰탱이가 아니란 말이다. 밟으면 밟히는 것이 민초들이지만 다시 일어난다. 후궁의 치마폭에 휘둘려 아들을 죽인 넘. 그것도 모자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를 죽이려는 살인마. 그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백성의 치욕이다." 이렇게 성토할 때 두 손을 잡아주며 '우리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 던 권대식. 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위기에 처한 자신보다도 권대식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군졸들의 포위망이 좁혀왔다. 숨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검(劍)은 순진하다. 이동시키는 방향과 힘과 시간 앞에 검은 충실하다. 때문에 사냥개는 주인을 물지 않지만 검은 자신의 주인을 벨 수도 있다.
상대를 베지 못하면 내가 베인다. 찰나의 시간과 싸움이다. 상대의 칼이 내 피부에 닿기 전에 내 칼이 상대의 살갗에 닿아야 한다. 그것도 급소에 닿아야 상대를 꺾을 수 있다. 헌데, 유탁에겐 제압해야 할 상대가 하나 둘이 아니다.
"얍!"기합소리와 함께 유탁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군졸 두 명이 고목나무처럼 쓰러졌다. 유탁을 에워싸고 있던 군졸들이 뒷걸음질 쳤다.
"물러서지 마라."별장이 고함을 질렀다. 느슨했던 포위망이 다시 조여 왔다. 군졸들을 향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유탁의 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거의 같은 시간, 군졸의 칼끝이 바람을 갈랐다. 순간, 푸른 하늘에 선혈이 튀었다. 선홍빛이다.
"윽!"하늘로 치솟은 피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유탁의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칼이 손을 벗어났다. 주인과의 작별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켜보던 보살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께에 칼을 맞은 유탁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놈을 묶어라"군졸들이 달려들어 그를 포박했다. 사로잡힌 산짐승처럼 묶인 유탁은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소식을 접한 그의 처 수정은 망연자실 했다. 어쩌다 산채에서 내려와 하룻밤을 묵고 가던 지아비가 하는 말에 희망을 걸었다.
그녀에게 그는 존경스러운 하늘이었다"조금만 기다리면 새 세상이 온다."두 손을 꼭 잡아주며 다짐하던 지아비가 칼을 맞고 잡혀갔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수정에게 유탁은 하늘이었다. 과거시험 준비하며 글방에서 세월 보낼 때도 올려다보았고 새 세상을 만들겠다고 산으로 들어갈 때도 우러러 보았다. 맑은 날보다도 흐린 날이 많았던 하늘이지만 그녀에겐 너무나도 가없는 하늘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수정은 공주 감영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