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에는 뚜껑이 있는데, 이 뚜껑은 종이로 막고 '드문 쇠돈'을 연도에 따라 모으며 차곡차곡 간수했습니다.
최종규
이태쯤 거의 날마다 찾아가서 몇 백 원씩 넣은 돈이 십만 원 남짓 불어난 어느 날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받던 누나가 "처음에 네가 몇 백 얼마를 들고 날마다 올 때에는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귀찮았는데, 여러 해 동안 이렇게 꾸준히 오는 모습을 보니 장난하는 아이가 아니어서 기쁘다."며 저금통을 하나 선물해 주는 한편, 제 보통예금 통장을 '복리 이자 자유우대 통장'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4학년이 된 다음에는 학교 마치고 집에 닿을 무렵이면 동네 앞 은행이 닫혀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어쩌는 수 없이 동네 맞은편 한일은행으로 못 가고, 학교 앞에 있는 새마을금고로 갑니다. 새마을금고에서도 똑같이 돈을 넣으니, 이곳에서도 한 해쯤 뒤에 저한테 "참 대단한 아이"라면서 저금통을 하나 줍니다.
저로서는 저 스스로 '대단한' 아이가 될 마음이 없었고, 그리 대단한 아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타지 않으니 날마다 돈이 푼푼이 쌓였고, 나중에 만화책이나 우표를 사고 싶어 은행에 건사해 놓았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남아 있으면 동무들이 꼬드겨 어쩔 수 없이 군것질을 하거나 오락실에 가야 했으니까요.
무엇보다 버스 차장 누나가 우리를 가리켜 '사치스럽고 고생을 모르는 아이'인 듯 주워섬긴 말이 끔찍하게 싫었는데, 먼 뒷날 이무렵 버스 차장 일을 하던 누나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삶을 보내다 도시로 와서 풋풋한 젊음을 보내야 했는가를 깨달으니, 이렇게 말할 만했겠구나 싶었습니다. 다만, 버스 차장 누나조차 도시 가난한 동네 아이들 삶과 이 아이들을 키우는 어버이 마음까지는 몰랐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