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동 책골목 책방 할머니.
이명주
자전거를 펼치고 보무당당하게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엔 꽤 재미가 있었습니다. 중앙동에서부턴 제법 이색적인 건물과 골목길 풍경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부산근대박물관 건물이 일제강점기 경제수탈 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였던 것도 확인하고, 너무 오래 전에 와서 기억에서 지워진 용두산 공원도 다시 봤습니다. 다채로운 서민 삶이 맛깔나게 버무려진 국제시장 골목도 들여다 봤지요.
가장 매력적인 곳은 보수동 책골목이었습니다. 대로변에 선 마을 간판에 '책은 살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방향을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색바랜 누런 책들이 벽돌처럼 쌓인 서점들이 보였습니다. 그 중 한 가게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샀습니다. 어릴 적 집 책꽂이를 한가득 채웠던 문학전집에 분명 있던 작품이었으나 최근에야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가격은 2천 원. 그러나 가격보다 더 착한 건 책방 주인들이었습니다. 책 제목을 말하면 "저 집에 있을 거다" 안내를 해주고, 사진을 한 장 찍자 하면 "저 할머니가 더 예쁘다" 점잖게 사양했습니다. '예쁜 할머니'께 "책은 저기서 사고 사진은 여기서 찍어 죄송합니다" 했더니 "아무데서나 사면 어때, 책 읽는 게 좋은 거지" 하시더군요. 기본 20년씩 이웃사촌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가족이나 진배 없겠지요. 인심과 더불어 길이길이 보존되면 좋을 곳입니다.
배가 고프니 '짜증 게이지' 급상승책골목을 나왔을 때 갓 정오를 넘겼습니다. 체력 소모가 서늘할 때와는 판이했습니다. 그래서 한여름 이동시엔 미리 휴식을 취하고 꾸준히 물을 섭취하는 게 중요합니다. 배가 고프니 '짜증 게이지'가 급격하게 올라 밥부터 먹었습니다.
구덕터널 근처 가게 이름이 '왕돈갓'이었는데, '왕'이란 말은 좀 무색한 그냥 돈가스였습니다. 하지만 에어컨 대신 여러 대의 선풍기로 효율적인 냉방을 하고, 더할 나위 없는 주인의 친절을 감안하면 별 3개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식사는 끝났지만 햇빛을 피해 1시간쯤 더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사이 주인이 와서 근처 산복도로를 보고 가라 조언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오늘밤 거처를 좌우하게 됐습니다. 산복도로는 60년 전 전국의 피난민이 모여 조성된 산동네로, 옹기종기 붙어 앉은 색색깔의 집들과 산 아래 펼쳐진 부산항이 절경을 이룬 곳입니다.
혹자는 그리스의 산토리니에 이곳을 비유하던데 텔레비전서 보고 한번쯤 와보고 싶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김해로 가는 가야로를 코앞에 두고 자전거를 돌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려움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묘하게 겹친 KBS 시청료거부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