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이 건립한 정자인 면앙정(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위와 같은 관직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송순은 선비인 동시에 고위관료였다. 이런 인물이 역사 드라마에 나온다면, 시청자들은 필시 그를 양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선비로서 과거에 합격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개성유수와 이조참판이 된 후에도, 송순은 양반 대우를 받지 못했다. 고향인 담양의 양반 클럽에서 그를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양 양반들이 송순을 거부한 것은, 그의 외가가 남원에서 담양으로 이주해왔다는 점과 그의 집안에 유명한 관료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완전한 담양 출신이 아닌 데다가 조상들이 '시시'하기 때문에 담양 양반으로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순이 대사헌이 된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감사원장 혹은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막강한 위상을 갖고 고향을 방문한 송순은 지역 원로들을 위한 연회를 마련했다. 이때 그는 담양 양반들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었다. 이를 계기로 담양 양반들은 회원명부에 송순의 이름을 기입해 주었다. 밥 한 끼 푸짐하게 얻어먹고 나서 송순을 담양 양반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송순은 결코 양반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선비와 양반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았던 시절 이 같은 송순의 사례는 고위층과 양반의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선비와 양반의 개념 역시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이것은 최 숙빈의 할아버지인 최태일이 선비였다고 해서 당시의 이 집안이 반드시 양반가였다고는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양반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최태일이 글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그의 아버지인 최말정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물론 최태일이 집안 사정에도 아랑곳없이 글공부를 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험법칙을 볼 때에 그가 공부를 했다는 것은 그의 부모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적어도 최태일 때까지만 해도 이 집안이 천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천민에게 '학생'이란 칭호가 부여되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최소한 할아버지 때까지는 최 숙빈의 집안이 적어도 평범한 평민 가문 이상은 되었음을 의미한다.
최태일의 손녀인 최 숙빈이 공노비가 된 것은 나중에 발생한 어떤 사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효원 때에 와서 이 집안이 공노비로 전락했기 때문에 최 숙빈이 공노비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최 숙빈이 나이 5세에 고아된 이후에 발생한 어떤 사정으로 인해 최 숙빈이 공노비가 되었을 수도 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최 숙빈의 아버지가 반체제 지도자였다고 설정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로 이 집안은 할아버지 때에 잠시 글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었을 뿐 별로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가문이었다. 이런 혈통에서 숙종의 후궁이 나오고 영조라는 걸출한 임금이 나왔으니, '개천에서 용 난다' 혹은 '개똥밭에 인물 난다'는 속담처럼 이 경우에 적합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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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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