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전쟁으로 부서진 교회 건물
현암사
눈 밝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미술사가 조이한은 뉴욕이나 런던과 같은 바쁘고 정신없는 삶과는 사뭇 다른 베를린의 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을 전한다.
그 일상을 스케치하는 방법이 독특한데, 예를 들면 동성애자의 거리인 놀렌도르프 슈트라세의 벤치나 '운터덴린덴'의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을 마치 차범근 감독이 하는 것처럼 해설하고 중계한다. 분데스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였던 차 감독처럼, 저자는 독일생활 13년의 경험과 관록을 책 곳곳에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안내하는 베를린은 교통의 중심지가 아니기 때문에 관광지가 주는 북적임에서 벗어난 여유로움이 깃든 도시이다. 나무와 공원이 많은 숲의 도시이며, 창작활동의 기초를 이루는 임대료가 저렴하고, 비어 있는 건물을 점거한 예술가에게 관대한 도시이다. 이러한 삶의 여유와 휴식, 넒은 공간과 지원제도가 있는 곳이 베를린이다.
이처럼 도시를 살피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려는 예술가나 그런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예술 정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의 상흔을 쉬이 지우기보다 기억하기 위해 애쓰면서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살아가는 베를린 사람들의 모습은 후반부에서 소개되는 베를린의 미술과 미술관이 갖는 특징과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미술, 미술관화가나 조각가는 대상을 단지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다. 예술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예술가는 그들이 표현한 대상이 갖는 귀중한 특징들, 특히 감춰져 있거나 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살려냈을 때 관객의 찬사를 받는다. 아마도 우리가 누군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대상이 갖는 특징이나 의미를 그 예술가가 잘 골라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화가가 어떤 풍경이나 인물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와 이미지를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여행할 때나 그 인물을 상기할 때마다 우리는 화가가 본 바로 그 관점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상은 예술에서 현실 세계로 옮겨질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전시물에서 이를 발견하지만, 나중에는 그림이 그려진 장소와 현실의 상황에서,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발견하고 기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베를린에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들 너머로 겨울 떡갈나무의 아름다움을, 케테 콜비츠의 조각 '피에타'의 너머로 전쟁의 참혹함을 계속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