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어린이 들이 함께 섞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문화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을 가진 아이들로 커갈 수 있습니다.
이주리
처음 아이들을 만나는 출발 날! 다양한 인종이 어울린 다문화의 프랑스답게 이 교실의 아이들도 크리스털 화채볼 속 형형색색의 각기 다른 과일들처럼, 프랑스인부터 한국계, 캄보디아계, 벨기에계, 영국계, 튀니지계까지 다양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검정머리에 검정 눈인 한국인 친구들만 있었고, 대학교에 와서 가끔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과 같은 수업을 들었던 저에게는 이 다양성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휘둥그레진 저의 눈을 보고 옆에 있던 프레드가 말했습니다.
"내 23년 인생 동안 술 먹으면서 친구들이 모두 백인이었던 적은 한국에 처음 와서 교환학생끼리 다 같이 술자리를 가졌을 때가 처음이란다."파리의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는 13구역에 사는 프레드는 친구들이 다 중국계 프랑스 친구들입니다. 초록 눈에 갈색머리, 마치 햇빛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한 것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파리지앵 프레드가 항상 '내 안에는 아시안의 피가 흐르고 있어'라고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보았습니다. 한 아이가 휴게소 음식 주문 카운터 앞에서 음식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게 내가 지난번에 부모님과 외식하면서 먹어본 자장면이라는 건데 진~짜 맛있어."이 친구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자장면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끼리 자장면이 한국 음식인지, 중국 음식인지, 일본 음식인지에 대한 토론을 벌이다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아이가 '저기 봐, 중국 음식이라고 쓰여 있잖아'라고 말하자 토론이 끝났습니다. 마침내 자장면이 나오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때 소스를 섞지 않고 먹는 아이가 제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자장면을 먹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를 그 아이에게 자장면을 바르게 먹는 방법을 알려줄 요량으로 옆으로 다가가 말했습니다.
"자장면은 소스랑 면이랑 비벼 먹어야 맛있는 거야."옆에 있던 친구가 제 말을 받았습니다.
"이 친구의 나라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데요. 그래서 소스에 고기가 들어 있어서 비빌 수가 없데요."다른 친구가 그 아이의 말을 고쳐주었습니다.
"'나라' 때문이 아니라 '종교' 때문이야."마침내 소스 없이 자장면을 먹고 있던 무슬림 아이가 친구들의 말을 정리해주었습니다.
"무슬림도 고기를 먹어. 단지 알라신께 기도하지 않고 잡은 고기를 먹지 않는 거야.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를 특히 좋아해. 하지만 돼지고기나 개고기 그리고 동물의 피는 먹지 않아. 그래서 고기를 잡을 때도 피를 다 빼낸단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할랄halal'이라고 하고 먹지 못하는 것은 '하람haram'이라고 해."8살(아니, 아이들 말로는 7살 반인 이 친구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서로의 문화를 알아 간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검정 머리, 검정 눈의 한국인이 아닌 친구는 교실에서 본 적이 없는 저는 어떻게 프랑스 사람들이 이런 다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지, 이 한 장면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한지공예, 고추장 만들기... 안동에 빠진 아이들하회마을에서의 4박5일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아이들이 방문한 곳은 한지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는 한지공장과 한지로 하회탈을 만들 수 있는 체험장이었습니다.
닥나무가 한지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한지로 만든 여러 가지 작품들을 본 아이들은 저마다 '신기하고 예쁘다'를 연발했습니다. 한 아이가 만든 한지 탈이 너무 예쁘다고 칭찬해주니, 서로 "선생님, 제 거는요?", "제 거는요~?"하며 망설임 없이 자기가 만든 하회탈을 높이 들며 솜씨를 자랑합니다.
하회마을에 있는 동안 우리가 묵는 곳은 전통 가옥 중 하나였습니다. 집 가운데 마당이 있는 ㅁ자 모양의 한옥이었습니다.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 두 분이 고추장을 만드는 과정도 보여주셨습니다. 유리문을 가진 침대 방에서 지내던 아이들이었지만 창호지문의 온돌 바닥에서의 첫날밤에 대해 어느 아이도 잠자리 투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낙동강이 마을을 두르고 있는 하회마을은 전통 가옥뿐만 아니라, 낙동강과 부용대가 어우러진 경치 또한 절경이었습니다. 아이들과 누각에 올라가 하회마을 정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마을을 산책하면서 전통가옥들을 스케치했습니다. 프랑스 아이들에게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전통가옥들은 엽서에만 나오는 사진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강가에서는 씨름 한판으로 아이들의 열기가 후끈해 졌습니다. 아이들은 더운 날씨에 모래가 뜨거워진 것도 모르고 자기편 친구를 응원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더위와 허기는 안동찜닭으로 한 번에 다스렸습니다.
6월 2일, 한국의 지방선거 투표일에는 이장님의 '동민 여러분, 빠짐없이 투표합시다'라는 마을 방송 때문에 모두가 일찍 잠에서 깨었습니다. 트로트를 개사해 유세음악으로 쓴 후보들 트럭이 지나가자 아이들은 "선생님 저건 뭐하는 트럭이에요?"라고 묻더군요. "선거에 나온 후보들이 자신을 알리고자하는 트럭이야"라고 대답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트로트를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날은 투표 후 하회마을로 나들이 온 관광객들로 마을이 북적였습니다. 하회탈 공연을 보기로 한 아이들은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 있는 공연장을 보고 들떠했습니다.
학교에서 일 주일에 한 번씩 사물놀이를 배우는 아이들은 북·장구·징·꽹과리 소리에 이미 익숙해 있었습니다. 공연을 알리는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서 학교에서 배운 가락을 직접 흉내내며 따라했습니다. 공연 중에 탈을 쓴 공연자들의 춤사위에 흥겨워하며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들은 보면서 '이들은 이미 반은 한국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박5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한 아이에게 "안동이 좋아? 서울이 좋아?"라고 질문을 던지자 한창 고민을 하더니, 안동도 좋지만 엄마가 있는 서울이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4박5일 동안 부모님도 많이 보고 싶었을 텐데 우는 아이 한명 없었던 게 대견스러웠습니다.
더 이상 '살색'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