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채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
이정근
"아서라,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재수 없다더라. 아무리 긴긴 해도 서산에 걸치면 어두워지겠지."마음을 다 잡은 이성용이 땅거미가 짙어오자 마을로 내려갔다. 이 모습을 당산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도둑고양이, 자기 집에 돌아오다"어이! 있는가? 나왔네."
사립문 앞에 발을 멈춘 이성용이 기침을 했다. 호롱불이 켜진 것으로 보아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인기척이 없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느 놈하고...?"노파심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언심 어미! 나 왔다 말일세."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정적이 어두움을 지배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언심이는 마마를 앓다 곰보가 된 이성용의 맏딸이다.
"이 밤중에 뉘시오?"아낙이 방문을 밀치고 나왔다. 머리를 매만지던 아낙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딱딱하게 굳은 이성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언심이 아부지 아니요?"버선발로 튀어나온 아낙이 이성용의 손을 잡았다. 고왔다. 어머니는 일도 못하는 손이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성용에게는 언제나 그리웠던 고운 손이었다. 그가 그 손을 처음 잡았을 때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꼈던 바로 그 손이었다. 굳어있던 이성용의 마음이 춘삼월 봄눈 녹듯 녹았다.
"어여 들어갑시다."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아낙이 이성용의 손을 끌었다. 그녀 역시 지아비가 산사람이 되었다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어찌 기별도 없이 이렇게 내려 왔습네까?"이성용이 아내가 보고 싶으면 부하 군졸을 내려 보내 연락을 취했다. 전갈을 받은 아낙은 몸단장 곱게 하고 지아비를 기다렸다. 운우의 정을 나눈 이성용은 먼동이 트기 전에 산으로 올라갔다.
목마른 눈초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당신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아이, 당신도..."아낙의 비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농익은 콧소리다. 아낙이 눈을 치켜떴다. '밤이면 밤마다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왔느냐?'는 목마른 눈초리다. 눈망울이 촉촉하다. 다른 곳도 젖어 있다는 신호다. 홍조를 띠던 아낙이 이성용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때였다.
"이 초관 있는가?"많이 들어보았던 목소리였다. 이성용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사립문 밖에 눈이 익은 얼굴이 있었다.
"자네가 왠일인가?"친구 배대승이었다.
"자네가 집에 왔다 하기에...""소식도 빠르군, 누가 그러던가? 건 그렇고 어서 들어오게."그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갑자기 찾아온 친구, 그 친구는 당산나무 뒤에서 훔쳐보던 사람은 아니었다"여보! 언심이 엄니! 대승이가 왔네. 어여 가서 막걸리나 내오구려."배대승의 손목을 잡고 방에 들어온 이성용이 설레발을 쳤다. 눈 꼬리를 치켜 올리던 아낙이 옷고름을 잡아당겨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산채의 공기는 어떤가?"배대승이 근심어린 눈초리로 이성용을 바라보았다.
"분기탱천해있네.""왜?""임금이 세자빈을 사사했다고." "산사람이나 백성들이나 똑같군."배대승이 한숨을 쉬었다.
"이 친구 말 듣자하니 부아가 치미는군, 산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 아닌가? 그 사람들이 오히려 나라 걱정하는 진짜 백성이라네.""노여웠다면 내가 사과함세. 내 말뜻은 그게 아니고...""알았네, 알았어,""푸 하하하, 퍼 허허허."두 사람은 손을 잡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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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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