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로 적극적인 정치.사회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배우 권해효.
유성호
조반을 생략한 아침이었지만, 결국 2분 늦었다. 안면이 없던 터라 먼저 도착해 노트북을 미리 켜놓고 카페로 들어서는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인생은 뜻대로 안 된다.
지각생 주제에 부산마저 떨었다. 배터리 부족 운운하며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녔으니 첫 만남, 퍽 불편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배우 권해효(44)와 첫 만남은 이렇게 어수선하게 시작됐다.
늘 무대에 서는 배우지만 직업인이자 생활인. 생각하는 만큼 실천하는 배우. 최근 소셜테이너(Social-tainer)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 연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과 맺은 9년간의 인연으로 12개 여성인권단체들의 터전 기금 마련을 위해 '연극기부'에 나선 따뜻한 사람.
"아 글쎄 말이에요. 홍보대사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았을 것을!" 순간순간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내면의 고민은 퍽 깊었다. 권씨는 한국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그 길에 도움이 된다면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 여성, 정치 등 발 딛고 선 우리 현실에 대해 기탄없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사느라 바빠 늘 생각주머니 한켠에 툭 밀어두었던 '행복'이라는 단어도 자주 꺼냈다.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가,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연구하는 철학자 같았다.
특히 "학교에서 경쟁하는 것만 배우다 졸업한다"거나 "적어도 학교만큼은 아이들이 경쟁보다 나은 것, 돈보다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학력신장 같은 허상을 다 없앴으면 좋겠"고, "수업내용을 지금보다 쉽고 편안하게 낮춰서 학교 다니는 순간 아이들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한다"는 당부는 동년배 아빠들과 고민이 닮아 있다.
"돈보다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걸 배우는 학교"... 안 되나?최근 빈발하는 아동성폭행 사건과 관련해서도 "과거보다 빈발하는 게 맞느냐, 데이터는 정확한지 묻고 싶다"며 "혹여 과거에도 지금처럼 사건은 많았는데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화학적 거세 논란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범죄자에 대한 계도를 포기하면서 출발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며 "성범죄자들이 좀 덜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가정과 교육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같이 해야 하는데 그런 문제의식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대중에게 카타르시스가 될지 모르나, 근본적인 성범죄 예방법은 아닐 것이라는 게다.
또한 그는 최근 <한겨레> 한홍구-서해성 직설파문('놈현 관 장사' 표현문제)에 대해 "<한겨레>가 그런 식의 사과를 하는 것은 처음 봤다"며 "느낌상 과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논점이 데스크가 헤드라인 장사를 했느냐 안 했느냐로 흘러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는 하나 꼭 그렇게 반응 안 해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그 지면이 갖고 있는 형식에 대해 간과한 게 아닌가 싶고, 그것 때문에 상처 받은 지지자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담대해질 때 우리가 다른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7월치고는 너무 더웠던 5일 아침, 배우 권해효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 12개 여성인권단체들의 터전인 '여성미래센터' 기금마련을 위해 <러브레터(Love Letters)> 연극기부에 나섰다. "여성연합과 인연 맺은 지도 햇수로 만 8년이 넘었다. 옆에서 보면, 단체 상근활동가들이 힘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늘 곁에서 후원하고 응원하는 분들도 시민사회 전반이 지쳐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어떻게 하면 신나게 할까 생각하다가.
나에게 대중 집회는 늘 벅찬 공간이었다. 사회 보는 일은 능력 밖의 일이고 힘든 일이었다. 한편으로 대중 집회에 참석하는 가수들이 참 부러웠다. 자기가 제일 잘하는 일로 대중과 소통하고, 노래 딱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갈 때, 참 좋아보였다.
이 연극은 이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여러 도네이션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연극공연은 지난 여성민우회 후원행사가 처음이었을 게다. 내가 즐거운 일, 하면서 행복한 일, (막상 만들어가는 과정은 힘들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 9년째 여성연합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무급일 텐데, 꾸준히 활동하는 이유가 있나."홍보대사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았을 것을! 겨레하나 빵공장 사업도 2004년에 시작했으니 여성연합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시작한 셈이다. 또 독립영화제도 올 겨울에 또 사회를 보게 된다면 10년째 한다. 뭘 하면 오래하게 되는 것 같다."
- 연극 <러브레터>는 어떤 작품인가. "이 작품은 1996년 한국의 초연무대에 내가 섰던 작품이다. 그때도 아내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번에도 같이 오른다. 아내 조윤희(배우) 이외에 다른 사람은 처음 함께하는데 이번에는 김여진씨가 함께한다.
이 작품은 미국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나 45년간 친구와 연인으로 지냈지만 결국 결혼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45년간 주고받은 편지, 제목 그대로 러브레터다, 그 편지를 무대 위에서 배우가 읽어주는 형식이다. 리딩 씨어터(reading theater). 한국에서는 이런 형태의 공연이 많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색다를 것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도네이션하니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