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부 뒤쪽에 그린 프레스코화.
가운데 오른팔을 치켜 든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와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이 보인다. 사진은 안내판에 그려진 그림.
박경
조각에 미쳐 있던 미켈란젤로는 천장화를 부탁받으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달라는 조건을 내걸 정도로 현실적이었지만, 피부가 썩고 등이 굽고 무릎에 물이 고이도록 그림을 그려내자면 지극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아무래도 힘들었겠지 싶다.
더구나 프레스코화라는 게 뭔가. 석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굳기 전에 그려야 하는 기법이다. 그래야 안료가 석회에 배어 들고 굳으면서 그 색이 석회 안에 가두어져서 오래도록 그림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두고두고 천천히, 룰루랄라하면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갔다 와서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때를 놓치면 덧칠할 수도 없는, 순간순간 피 말리는 마감이 촉박한 작업이었을 터.
그런 지난한 작업을 하려면, 천재의 열정뿐만 아니라 신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야 마땅하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서 발칙한 상상이 떠올랐다.
1541년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비난이 쏟아졌다. 그리스도가 이교신인 아폴론을 닮았다는 둥, 수염도 없다는 둥, 성자들이 죄다 알몸으로 등장한다는 둥, 예배당보다는 목욕탕 그림으로 어울린다는 둥.
이에 미켈란젤로는 "타락한 우리 신앙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라고 반박했다.
어쩌면 미켈란젤로의 메시지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성스러운 그리스도를 일부러 홀딱 벗겨놓고, "이 ××놈아 이건 너무 추하잖아", 시비 걸면 "됐거든 댁이 더 추하거든" 이런 식으로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인간을 심판하는 신의 권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들의 다툼과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저한 신심으로 창작의 고통을 이겨냈다기보다는 못난 인간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그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때로 예술은, 아름다움과 선량함과 순수보다는 미움과 갈등에서 싹이 트고 상처를 자양분 삼아 승화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결국 교황 비오 4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수정하기로 결정한다. 벌거벗은 성자들에게 옷을 입히기로 하고 그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맡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기저귀 찬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
사진 안 찍은 게 오히려 다행천장 가득 그려진 천장화를 올려다 볼 즈음에는 이미 내 목은 과부하로 디스크가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천지창조(아담의 창조)'는 확인해야겠기에, 아픈 목을 손으로 받쳐가며 올려다보았다.
목을 좀 쉬게 하려고 고개를 떨구자면, 여전히 아래는 와글거리며 소란스러운 구경꾼들로 가득하다. 위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가, 밑에는 여전히 시장바닥 같은 인간 세상이다.
감시인이야 소리치든 말든 슬쩍슬쩍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솔직히 나는 좀 놀랐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 주고, 땡큐, 쏘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서양 사람들은 하라는 짓 안하고 무례한 짓 안 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 말라는 짓 몰래 하고, 찍지 말라는데 사진 찍고, 다른 사람 생각 안 하는 건 늘 무례한 '어글리 코리안'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편견은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완전히 깨져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 대한 배려와 공중도덕부터 배웠음직한 얼굴 하얀 백인들이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으니. 이쯤 되고 보니 나도 슬금슬금 마음이 동한다. 다들 찍는데 나만 순진한 거 아닌가, 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감시인이 많은 걸 보면 그만큼 사진들을 찍어댄다는 걸 반증하는 게 아닌가, 플래시 없이 찍는 건 괜찮지 않을까, 저 잘난 백인들은 플래시까지 터뜨리는 데 말야. 그렇게 가슴 졸이며 가방 깊숙이 처박아 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마침내 슬그머니 꺼내들게 된 건 결정적인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엄마, 우리도...... 찍자......"우리 딸이 누구인가. 바야흐로 사춘기, 지들끼리 비속한 욕지거리는 나눌지언정, 길가면서도 목소리 커서 창피하다며 내 입을 틀어막고(맹세코 난 목소리가 크지 않다), 뭔가를 가리킬 때면 가운데 손가락을 내미는 버릇이 있는 아빠를 여행 내내 주의시켜 스트레스 지수 팍팍 올리게 만들던 딸이다. 언젠가 티벳 사원에 갔을 때에도 '여자는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을 보고,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도대체 뭔가 잠깐 고개만 빼고 들여다 볼 때에도 내 옷자락을 잡아끌고 꾸짖은 건 딸이었다, 왜 예의도 없이 하지 말라는 짓 하냐고.
그런 딸이 찍잔다, 사진을. 어린 딸이 천재의 걸작품에 숨막히도록 감동한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순전히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게 면죄부를 주었다. 결국 내가 무너진 건 훌륭한 그림 때문이 아니라 딸에게 빙의한 악마의 속살거림 때문이라는 걸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눈 앞에 카메라를 갖다 대보지도 못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드는 순간, 한 떼의 무리들을 몰고 온 가이드가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공격적으로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퉁퉁하게 살집 오르고 가무잡잡한 여자 가이드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고 있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찍어 누를 듯한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딴 짓 하면 너네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사방에서 플래시까지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찍지도 않은 나한테만 그러는 게 적이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우씨, 왜 나만 갖고 그래.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한 건지 지우려고 한 건지 지가 어떻게 알고. 그러나 사진을 찍지 못한 건 잘된 일이다. 아니라면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할테니. 또 어디에다 그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놓겠는가.
나는 짐작한다, 이런 고백 뒤에 돌아올 비난의 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털어놓는 건, 예술을 마누라로 여기고 자신의 작품을 자식이라고 말했던 한 예술가의 명작을 보고 돌아온 자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쯤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또한 그런 어리석은 짓거리들 다 부질없으니 나를 타산지석으로 삼으시라는 의미쯤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