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죽음을 맞는 티에노 보카티에노 보카는 셰리프 하말라의 기도문 11번 암송을 존중해 줄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족민 모두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마침내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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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11 그리고 12>에 나오는 기도문 암송 횟수를 둘러싼 분쟁과 같은 상황들은 굉장히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소재다. 멀리 가지 않고 당장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당파싸움에서 국상 장례 절차상의 사소한 이견을 빌미로 귀양을 보내고 사약을 내리는 등의 사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게다가 프랑스 식민정부가 부족들간의 이 분쟁을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활용하는 장면 역시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굳이 예를 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기자는 개인적으로 부조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부조리극은 말 그대로 극의 형식이 부조리하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부조리한 극 형식을 빌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부조리극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비록 연극 공연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직접적인 표현으로 호소한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극 형식으로 인해 해석의 여지가 더 많아야 할텐데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더 많이 보았다.
반면 피터 브룩의 이 연극은 정극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과장이 전혀 없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단순미의 극치를 선사하는 간소한 무대 위에서 인류에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부조리한 현상을 고발하고 있다. 지극히 보편적이기에 딱히 어느 누구를 고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부조리에 일정 부분 가담하고 있는 관객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고 있다.
솔직히 남에게 화살을 돌릴 일이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라. 과연 자기 자신도 이러한 부조리에 일상적으로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녀의 차이, 인종의 차이, 종교, 정당, 지역, 학벌 등등..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자신과의 차이로 인해 비관용적이며 비타협적, 차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말이다.
배우들은 결코 몰입하거나 열정적인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암쿠렐 역을 맡은 배우는 두 사람이 붉은 천을 감싸 배 모양으로 만든 위에 올라타 있는 장면을 보고 웃는 관객들을 향해 자신도 씨익 미소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내내 지속되는 내레이션과 함께 자신이 무대 위의 배우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려는듯, 브레히트적 소외(alienation, 거리두기, 멀게 하기, 낯설게 하기) 효과에 치중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인해 관객인 나 자신이 훨씬 더 객관화되고 타자화 되었지만 셰리프 하말라와 티에노 보카가 보여준 저항과 관용의 정신,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보여준 감동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려할 정도로 슬퍼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감상에 빠지기 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객관화된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평범할 수 있는 관용이라는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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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발, 피터 브룩의 메시지 '관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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