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Vs 양혜왕 (2)

맹자읽기

등록 2010.06.18 11:49수정 2010.06.1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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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왕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전에 어쭙잖게 말을 붙였다가 혼쭐이 났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딱딱한 집무실이 아니라 호젓한 정원 호숫가를 2회전 장소로 정해본다. 말하자면 이성(理性)이 아니라 맹자의 감성(感性)측면을 노려보자는 것. 일단 전략은 좋아 보인다.

맹자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처럼 짐짓 딴청을 피우던(王立於沼顧鴻雁麋鹿) 양혜왕의 느닷없는 선빵(?). 현자 역시 이런 것들을 즐깁니까(賢者亦樂此乎)?


*王立於沼上顧鴻雁麋鹿曰賢者亦樂此乎

먼저 동사를 찾아보면 서있다는 립(立)이 보인다. 왕은 서 있다. 어디에, 소(沼) 위에. 여기서 상(上)은 위로 번역하면 곤란하다. 무림 초절정 고수가 아닌 뒤에야 어떻게 물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상(上)은 이럴 땐 ~가로 해석해주어야 한다. 돌아보다는 동사 고(顧)가 있다. 그러니 문장은 상(上)뒤에서 일단 끊어주자.

동사가 있으면 목적어가 반드시 따라온다. 돌아보는 것은 홍안(鴻雁)미록(麋鹿)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동사는 즐긴다는 악(樂). 무엇을? 이런 것들을. 새들과 짐승이 뛰노는 임금의 정원풍경, 그리고 그런 여유를. 정리하자면 왕이 연못가에 서 있었다. 홍안미록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현자(賢者)라는 사람들 역시 이런 것들을 즐깁니까?"

양혜왕이란 사람, 맹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전번에 그렇게 맞고도 아직도 맹자의 성깔을 모르다니. 또 껄떡거리신다. '현자(賢者)라는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정원의 규모와 아름다움에 대한 과신. 아아. 정말 이쯤 되면 매를 번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맹자 역시 답답한 인물이기는 마찬가지. 안면도 어느 정도 익었고 전번에 일도 있었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만도 한데 맹자, 이 양반 앞뒤로 꽉꽉 막혔다. 그러니 맹자와 양혜왕은 대척점(對蹠點)에 자리하지만 접으면 완전히 서로 겹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너 이런 것 봐 봤어?"라고 우쭐거리는 말인데, 맹자께서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이렇게 대꾸해주신다.

"현자(賢者)가 된 이후에야 이런 것을 즐기는 것이지, 현자(賢者)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이 있다 해도 즐길 수 없는 법(賢者而後樂此不賢者雖有此 不樂也)."

*賢者而後樂此不賢者雖有此不樂也
이(而)는 앞뒤로 동작 연결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현자(賢者) 이후에야'라고 이해하는 것보다 '현자(賢者)가 된 이후에야'라고 동적개념이 드러나게 번역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현자(賢者)와 불현자(不賢者)의 댓구로 이해하면 전체가 잘 보인다. 정리해보면 賢者而後樂此 不賢者雖有此 不樂也


맹자의 대꾸에는 당신은 현자(賢者)가 아니며 더 나아가서 '당신은 이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조금은 험악한 전제(前提)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주군(主君)을 선택하는 시대라고 해도 이건 좀 과하지 않은가? 후대 편집과정에서 가감(加減)된 것이 아니라면 맹자가 무모한 것인지 아니면 양혜왕이 무골호인(無骨好人)인지 알 수 없다.


이 뒤로는 다시 1회전의 반복이다. 단 한번의 껄떡거림, 그 뒤의 일방적인 난타. 맹자는 일단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편을 인용해준다. 영대(靈臺)란 주(周) 문왕(文王)의 대(臺)를 말한다. 문왕(文王)이 대(臺)를 건설할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자기 일처럼 달려와서 지어주고 왕과 함께 그 대(臺)의 아름다움을 같이 즐겼다는 것이다.

맹자의 속뜻은 이렇다. 고작 이걸 가지고 자랑스러워하십니까. 문왕(文王)의 경우를 보십시오. 백성들이 달려와서 왕에게 대(臺)를 지어주고 그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정원은 누가 지어주었나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백성들과 함께 즐기고 있기나 한가요? 혼자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랍니다.


여기서, 이 정도로 멈춘다면 그건 맹자가 아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서경(書經). 탕서(湯誓)>를 인용하며 강도를 점점 더 높여간다. "이 태양이 언제 없어질까? 나는 너와 함께 망하리라(時日害喪 予及女偕亡)." 그런데 이 대목은 아무리 맹자라고 해도 좀 심하지 않나 싶다.

너는 걸왕(桀王), 나는 은(殷)나라의 백성들. 너와 함께 망하겠다는 말은 자신은 언제나 영원한 태양 같은 존재라는 자만에 빠졌던 걸왕(桀王)을 은(殷)나라의 백성들이 비난하면서 했다는 말인데 그 내용이 경악스럽다. 백성들의 지독한 분노가 이것보다 잘 표현된 말이 있겠는가?

좀 오버를 하면 당신은 걸왕(桀王)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순식간에 문왕(文王)과 비겨져서 형편없는 왕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 폭군(暴君)의 대명사인 걸왕(桀王)과 같다고 하였는데도 양혜왕은 반격 한번 제대로 못해본다. 이러니 장소를 옮겨본들 무슨 소용인가? 게임 스코어 2 : 0

더욱 더 알 수 없는 일은 이렇게 형편없이 두 차례나 두들겨 맞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의 문을 살짝 열어 보이니 양혜왕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성격의 인물인 듯싶다. 혹시 일종의 피학대증(메조히즘)? 

여기서 잠깐, 맹자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던 양혜왕은 양나라 혜왕? 물론 아니다. 위(魏)나라 왕이니 위(魏)혜왕(惠王)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럼 왜 시호 앞에 양(梁)자를 붙였을까? 지명을 시호 앞에 붙인다는 것, 이건 무슨 사연이 있다는 말이고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진(晉)이라는 제후국이 있었는데 위치한 곳이 중원의 한복판이었다. 찍어 누르고만 있어도 천하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요혈중의 요혈. 주(周)나라 왕실을 북에서 껴안고 섬서 지방을 크게 돌아 내려오는 황하(黃河) 양 유역(流域)에서 동북으로 연(燕)나라와 경계를 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시기가 있었다.

제후국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며 천하를 호령했던 진(晉)은 결국 전국(戰國)이라는 사회 경제적 환경에서 세력을 불려나간 세 대부(大夫)들의 난으로 위(魏), 한(韓), 조(趙) 세 나라로 쪼개진다.

세 나라 중 위(魏)나라는 문후(文侯) 시절에 잠깐 강력해졌지만 그 후로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잠깐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위(魏) 문후(文侯)의 손자가 바로 양혜왕이다. 이 때 나라의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에 양(梁)이라는 지명이 혜왕이라는 시호 앞에 붙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위업(偉業)을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그가 받았을 기대는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능력은 불급(不及), 또는 불초(不肖). 압력은 오는데 방법이 없는 것. 뭔가 해내긴 해내야겠는데 상황의 여의치 않다는 것, 우리들은 보통 이런 상황에서 '미치겠네'라고 말한다.

그러니깐 양혜왕은 이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고통스럽게 이어간 사람이다. 태자(太子)인 아들까지 전쟁터에서 잃어가면서, 하내(河內)에 흉년이 들면 백성을 이주시키며 하동(河東)의 곡식을 하내(河內)로 옮겨가며 안달을 해보지만 나라는 날로 기울어간다.

장자(莊子)나 맹자 같은 이른바 현자(賢者)라는 사람들을 초빙하고 뭔가 듣기를 원했던 한편으로 닭싸움이라는 잡기(雜技)에 몰입했던 일이나 맹자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면서도 악착같이 매달리는 복잡다단한 성격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어찌되었던 간에 내가 보기엔 양혜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사람일 수 있다. 본인의 가진 능력에, 그리고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맹자 #양혜왕 #춘추오패 #전국시대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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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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