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어왕>아버지 글로스터 앞에서 옷을 찢으며 자신이 아들이 아닌 것처럼 연기하는 에드거
극단 미추
아버지 글로스터를 설득, 그래도 생은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에드거.
"이게 밑바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결코 밑바닥이 아닌 것이다."에드거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그의 자살을 막는다. 그러나 삶은 너무나 처연하게 타인의 칼에 글로스터가 죽도록 놔둠으로써, 만신창이가 된 삶의 혹독함과 마주서서 보도록 유도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성은 이런 대면의 순간에 쏟아져나오는 진실의 버거움에서 나온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볼 때마다 숙연해지는 이유다.
이 권력의 가면은 세대를 관통해서도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음을 배운다. 세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권력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사람들을 섬기겠노라 호언했던 자를 군림하게 한다. 평생 권력이 자신에게 입혀진 한 벌의 옷과 같은 것일 거라 믿게 한다. 왕과 백작으로 살아오던 리어와 글로스터는 그 옷을 벗고나서야 남의 말에 조정당해 온 자신의 면모를 수월하게 보게 된다.
리어는 말한다 "죄악에 황금의 갑옷을 입히면, 날카로운 정의의 창도 상처를 내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다"라고. 정치 지도자의 도덕적 결함을 발견하고도, 그저 배부르게 살 수 있다는 생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지도자를 세우고 그에게 황금 갑옷을 입힌다. 이 경우 아무리 투표를 하고 저항을 해도 그 정의로운 절차의 힘이 갑옷 속에 숨은 죄악을 드러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