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디 가스나, 어디서 냄새 나는 발꾸락 처씻고 자빠졌노

[바깽이의 스위스·이탈리아 여행기 17] 시간마저 화산재에 묻혀 버린 폼페이에서

등록 2010.06.12 19:21수정 2011.12.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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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

절벽에 매달린 마을 포지타노는 단풍든 것처럼 울긋불긋하다. 포지타노를 등지고 걷노라면 발 아래는 푸르른 물결이 태양빛에 유리조각처럼 잘게 부서지는 아말피 해변.

패키지 여행이 아니었다면, 서울에서부터 가방 속에 수영복을 구겨 넣고 와 아말피 해안에서 수영을 했으리라. 하지만 아말피를 거쳐 폼페이를 가는 길은 차편이 너무 복잡하고 비싸다는 여행사의 위협에 넘어가 투어를 신청하고 말았다.


이 뜨거운 여름날, 바다를 눈 앞에 두고도 그저 바라만 보다가 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되돌아 나와야 하는 일, 마지막 일행이 나타날 때까지 땡볕에서 아말피 해안을 아득히 내려다 보며 좀 더 있다왔어도 됐을 걸, 후회하는 일은 투어 여행자의 슬픈 운명이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의 하나가 아말피 해안이라는 말에는 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아말피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면, 우리나라 홍도는, 가보기 전에는 죽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다. 지중해라고 특별한 것도 없었다. 솔직히 나는 아말피 해안이 지중해라는 걸 보는 순간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곳을 돌아서는 순간, 아차, 거기가 지중해였지, 내 생애 처음 만나는 지중해였지,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뒤돌아 볼 정도였으니.

여행자들은 때로 호들갑스럽고 때로 과장한다. 아니라면, 스위스에서부터 베네치아,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동안 호사를 누린 내 눈이 눈썹 위로 기어 올라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말피의 예의 없는 것들

햇살은 점점 버르장머리 없이 머리 꼭대기로 올라오고 있다.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목이라도 축일 겸 간이 수도 앞에 줄을 선다. 외국인들도 줄을 섰다. 그 사이에 끼여 있던 솜털 보송보송한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우리 여학생 차례가 되었다. 로마를 한나절만 돌아다녀 본 여행자라면 다 안다. 이탈리아 곳곳에서 마주치는 식수대는 길가는 자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아니, 그런데 이 여학생, 다리를 번쩍 쳐들어 올리더니 수도에 발을 갖다 대는 것이 아닌가. 여학생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알통 생긴 종아리를 두어 번 휘휘 돌려 헹구어 내는 동안 나는, 뒤에 선 외국인들의 뜨아한 표정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물통에 물을 받거나 손으로 물을 받아 목을 축이고자 줄을 선 사람들이었다.

'이 문디 가스나! 여가 느그 집이가! 냄새 나는 발꾸락 처씻구로!'


이렇게 한소리 하고픈 이 아줌마의 욕망을 꾹꾹 참은 것은,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나와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보긴 처음이었다. 가이드를 앞장 세우고 떼로 몰려다니기(이름하야 패키지 여행)도 처음이다. 하여, 테르미니 역에서의 7시 모임에 늦지 않기 위해,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까지 마다하고 남편과 딸을 몰고 나갔다.

모임 장소인 맥도날드 앞에 도착하고 보니, 우띠… 아무도 없다. 햄버거로 아침을 대신하며 기다리는 동안 가이드가 나타났다. 시간에 맞게 나타난 우리에게 왜 황송해 하는지 그때까지는 몰랐다. 10분 넘어가자 동행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먹자마자 바로 밀어내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남편은 화장실로 이미 직행했다. 보아하니 다 모이려면 30분은 족히 걸릴 거라고 느긋하게 한마디 날리고는.

20분이 넘어가자 얼추 반쯤 모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모습들이 태평이었다. 한참을 늦었으면서도 미안해 하는 기색은커녕 서두르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학생들로 보였다. 명단을 확인하는 가이드에게 슬며시 위로 겸 말을 걸었다.

"어쩜 저렇게 태평들이죠?"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가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짙은 선글라스인데도 짜증 섞인 표정은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한마디 속삭였다.

"이따 버스 탈 때 좋은 자리 배정해 드릴게요, 제일 일찍 오셨는데."

앗싸! 으쓱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슬슬 불안해진다. 남편이 나타나질 않으니. 30분이 넘어가자 거의 다 모인 눈치다. 제일 먼저 나타나서는, 시간도 안 지키네, 예의도 없네, 깝죽대던 나는 점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선글라스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우리보다 늦게 나타난 사람들을 먼저 인솔해서 지나쳐 간다. 선글라스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제일 일찍 나와 출근 도장 찍고 사우나 가버린 걸 사장님께 들킨 심정이 이럴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자식 가진 부모 남의 자식 욕할 거 없다더니, 남편 가진 아내들 자신할 일 아무것도 없다.

시간마저 화산재에 묻혀 버린 폼페이

버스는 아말피 해변을 끼고 절벽의 해안 도로를 달렸다. 닿을 때마다 기분 나쁘게 쇳소리를 내는 발판은 관광버스가 중국산이라는 걸 자꾸 일깨워 주는 바람에, 여행하다 죽는 게 행복한가 아닌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에 빠져든 사이, 폼페이에 닿았다.

서기 79년, 꼭 이렇게 더운 8월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그 화산재에 묻혀 버렸던 도시, 폼페이. 상업이 발달한 이 도시가 얼마나 번성했었는지, 천년하고도 구백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었고, 일방통행의 표시가 있었고, 횡단보도 겸 마차들의 속도방지 턱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1900여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휘리릭 사라져 버리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그 긴 세월이 이렇게나 짧게 느껴지다니.

도로에 그대로 드러나는 바퀴의 흔적만 보아도 그렇다. 폼페이의 많은 것들이 바로 어제의 것처럼 생생한 건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옛날의 유적지를 찾으면, 그 빛바램이나 흔적들을 통해, 통과해 온 시간의 결을 느끼곤 했었는데, 폼페이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의 결을 느끼게 된다. 폼페이의 흔적들은 바로 일 이백년 전의 것들처럼 생생한 듯 싶고, 그 일, 이백년마저도 일, 이십년으로 급속히 단축되는 걸 경험하게 된다. 시간마저도 흘러내린 화산재에 묻혀버린 것처럼 말이다.

밤길을 밝히기 위해 야광돌을 박아 놓은 차도를 지나 목욕탕으로 이용되었던 건물로 들어갔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선글라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우리 일행은 잘 교육된 쇼핑채널의 알바들처럼 집단으로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물론 우리의 감탄사는 지극히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목욕탕에는 옷을 올려둘 수 있는 선반은 물론이고, 온탕의 뿌연 김을 제거하기 위한 분수도 그대로 남아 있다. 뿐이랴. 그 오랜 옛날에도 과학적인 상식들이 발현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증기가 떨어지지 않고 벽을 타고 흘러내리게끔 골이 패여져 있다든가 뜨거운 물이 벽 속으로 흘러 실내를 덥힐 수 있도록 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급속도로 시간의 간극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사라졌던 시간의 결들이 되살아나는 곳이 바로 폼페이의 유곽이다. 유곽의 방들마다 보이는 돌침대는, 저기서 어떻게 그 짓거리(?)를 했나 싶을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다만, 옛폼페이인들은 키가 참 작았나보다, 헤아릴 뿐. 그렇게 작은 걸 보니 참 오랜 시간 이전의 흔적들이로구나, 비로소 시간을 거슬러 보게 된다. 비로소 긴 시간의 간극을 깨닫게 된다.

실감나지 않는 폼페이인들의 화석

재미있는 것은, 창녀의 집에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어 있는 성행위 장면이다. 아마도 말이 안 통하는 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리라. 확실히 폼페이가 외국인들이 드나들 정도로 상업이 활발하고 번성한 도시이긴 했나 보다.

화산재 속에 파묻혀 죽어간 폼페이인들의 화석은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고통으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자, 죽어간 임산부의 모습들은 돌이 되어 남아 있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차라리 폼페이 유적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기견들이 더욱 현실적이다. 차라리 삭아 허물어진 벽을 타고 올라 얼키고 설킨 나무 넝쿨들은 폼페이에서 더욱 생생하다. 로마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어둠을 맞았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폼페이의 밤길이 훤히 그려진다.

바닥에 드문드문 박힌 야광돌들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폼페이. 밤이면 비로소 깨어나는 벌레들의 합창소리가 원형극장에 낮게 깔리는 폼페이. 유곽엔 외로운 영혼들이 바람처럼 흘러들어가고. 베수비오산의 검은 실루엣이 아득히 멀어지는 시간.

욕탕에 뻗은 채로 휴식을 취하던 유기견들이 깨어나 어슬렁거리는 깊은 밤이 되면 웅크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만 같은 폼페이는, 어쩌면 달빛 내리는 밤이 되면 더 생생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폼페이 #아말피 #이탈리아 #베수비오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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