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짜리 신권.
김덕진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용산을 떠올리셨다는 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갑자기 닥친 어머니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서 똑같이 억울한 죽음을 맞으신 용산참사 철거민들을 찾아오셨다며 조의금을 놓고 가셨다. 일주일 쯤 후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미사가실 때 들고 다니시는 가방 안에서 천원짜리 신권 한 뭉치를 발견했다며 이렇게 정성을 모아 봉헌하시고 싶으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대신해 용산에 봉헌하신다며 두 번째 봉투를 놓고 가셨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셨을까? 이름도 적혀있지 않아 누구신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지면을 빌어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용산에서의 1년,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어찌 기억나는 분들이 더 없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던 전국 각지 방방골골의 사람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추수한 쌀로 용산 식구들의 밥을 지어먹이고 싶다고 들고 오신 분, 결혼식에서 화환대신 받은 쌀을 보내주신 분, 김장김치 50포기를 손수 가져오신 분, 주방이 딸린 차를 직접 가져오셔서 자장면 100그릇을 만들어 주신 분, 매일 미사에 오셔서 미사 안내를 맡아주셨던 분들, 오실 때마다 김밥과 떡을 싸오시고 나물이며 장아찌를 손수 담구어 오신 수녀님들, 매주 화요일마다 저녁식사를 도맡아 주셨던 서울의 한 성당 신자들…. 그 작지만 따뜻한 마음을 도대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자본과 공권력은 내게 가장 시리고 눈물 나는 용산에서의 1년을 살게 해 주었지만 이 분들은 내 생애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선물해 주었으니 용산에서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종회, 박래군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나 남경남 전철연 의장 등도 진작부터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10개월 가까운 수배생활을 견디어 냈고, 용산범대위 상황실 활동가들도 기존의 일과 사생활을 모두 버린 채 용산에 오롯이 1년을 바치며 살아준 고마운 이들이다.
전종훈, 이강서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남일당 본당 신부를 자청했던 이강서 신부, 천막을 짓고 삭발을 하고 단식기도를 하며 전국에서 시국미사의 바람을 일으키고 시청광장에서, 남일당 앞 용산대로에서 경찰에 가로막히고 팔이 꺾이면서도 남일당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는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과 함께 했던 오체투지의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채 다시 용산에 천막 기도처를 지었다.
멀리 원주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달려오는 유이규 신부, 용산 천막을 지키다가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현장까지 달려가 매일 미사를 봉헌했던 강정근 신부, 영원한 사제들의 대변인 김인국 신부, 묵묵히 용산 현장을 지키며 천막기도처의 살림을 맡았던 나승구 신부, 10년간의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바로 다음날부터 용산천막을 지켜 온 장동훈 신부 등 용산에서 정의가 살아있음을, 여전히 종교인들이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있음을 증거 해 준 사제들의 이름을 다 불러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 사제들은 또 지난 5월 4대강 삽질 중단을 호소하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보름 동안 노숙 단식기도를 진행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로 밖에는 달리 드릴 말이 없다. 전국의 성당과 수도회에서 모인 정성은 그 후원금의 액수도 엄청났지만 물품 후원도 대단했다. 천주교인들이 용산에서 보여준 힘은 오만명을 다 배불리 먹이고도 일백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였다. 오래전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두며 성당과의 인연을 끊었던 나를 다시 성당에 가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기독교인들과 불교인들 역시 용산을 위해 큰 힘을 보태주었다. 서울 봉은사 명진스님은 천일수행 중 모으신 시주금 1억원을 유족들 후원을 위해 쾌척해 주셨고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선출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용산 현장을 찾았다. 김삼환 목사가 이끄는 한국교회봉사단은 유족들을 위한 지원금 1억원과 모란공원의 묘지대금을 부담해 주었고 매주 목요일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평화 예배를 이어갔다. 전국의 사찰과 교회에서 각종 후원 물품들과 후원금들이 답지했고 용산참사 철거민들과 유족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종교의 힘이 라는 것에 다시금 경탄하는 순간들이었다.
용산 남일당을 이야기하며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용산을 지킨 미디어 활동가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이 1년 동안 찍은 필름을 한 줄로 이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촬영만 한 것이 아니라 남일당에 생명력을 가져왔다. 그들이 레아 미디어팀을 꾸리고 카페 레아를 시작하면서 용산은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가끔 그들이 직접 볶아서 뽑아준 원두커피를 맛보곤 했다.
용역회사 직원들하고 시비가 붙거나 경찰이 철거민들을 잡아가려고 하고 현수막을 떼어가고 천막을 부술 때도 카메라를 들고 와서 그 폭력의 현장을 찍어 증거를 남겨주었다. 추모집회마다 영상을 만들어 주었고 인터넷 UCC를 점령했다. 이들은 지금 또 청테이프를 칭칭 감은 카메라를 들고 소외된 이들의 눈이 되고 기억이 되어 주고 있다. 특히 미디어팀의 최고령 작가로 용산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담아 "용산 남일당 23×371"이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 오두희 여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민중시인 송경동, 그가 시인으로 살길 바라는 까닭아마 용산에서의 1년 동안 양심과 혼이 살아있는 모든 문화예술인들은 용산을 다녀갔을 것이다. 그중 송경동이라는 걸출한 시인을 우리는 만났다. 평택 대추리에서,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그를 만나왔지만 용산에서 송시인은 대(大)시인이 되었다. 민중시인 송경동은 시를 지어 낭송할 때 마다 사람들을 울게 했다. 그는 경찰들과 싸우면서 시를 지었고, 술 마시며 시를 지었고, 회의하면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우리 모두의 절규였고 희망이었다.
그는 투사로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가 시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공선옥, 도종환 등 유명한 문인들이 현장을 찾아 시를 쓰고 글을 썼다. 이 문인들이 엮은 책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는 두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글에서 글쓴이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감동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글이 눈물을 흘리고, 글이 절규하고, 글이 속삭이고, 글이 분노하는 책을 만들어 준 작가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안치환, 한동준, 노래를 찾는 사람들, 박준, 꽃다지, 최도은, 윤미진, 지민주 등 수십 명의 노래꾼들은 수시로 용산에 불려와 열악한 음향시설에서 최고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차비 한번 보태드리지 못하고, 된장찌개 식사 한번 대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말로만 고마움을 표하고 말았다. 연극인들은 매주 금요일 '끝나지 않는 연극제'를 열어 대부분의 철거민들에게 생애 첫 연극 관람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제주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부산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이 연극쟁이들에게 편안한 잠자리 한번 준비해 드리지 못한 죄송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꼼꼼하게 챙겨 준 극단 한두레 김경화의 노고 역시 무엇으로도 보답하기 힘들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정말 중요한 순간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무엇보다 전미영, 이윤엽 등의 미술가들은 용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다 망가져서 폐허가 되어있던 김순옥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남일당 건물과 레아 건물을 커다란 설치미술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들이 붓과 페인트 통을 들고 벽에, 유리창에, 샷시에, 간판에, 아스팔트에 붓질을 하면 그 자리가 미술관이 되고 박물관이 되었다. 미술가가 아니라 마술사 같은 그들은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며 용산을 지켰다.
그들의 그 끝없는 열정은 '끝나지 않는 전시'라는 책으로 탄생했고 망루전(亡淚戰)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이들의 활동으로 생긴 모든 수입을 백원짜리 하나까지 용산범대위에 기부하여 예술가들이 왜 배고프게 살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지금도 현장미술가들의 두목 전미영 서울 민족미술인협회 대표가 시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작가들이 모여 '미영이가 시킨 전(展)'이라는 이름으로 용산을 기억하는 전시회를 계속하고 있다.
모두 다 너무나 감사드리고 눈물 나게 반가웠지만 '거리의 신부, 깡패 신부' 문정현 신부께 가장 애틋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어깨 수술에서 채 회복되지도 않은 노구를 이끌고 홀로 기차에 몸을 싣고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을 찾아 오셨다. 유족들의 손을 잡고 말없이 한참을 우시고는 군산으로 돌아가자마자 전국을 누비던 '꽃마차'를 이끌고 용산참사 현장으로 오셨다. 그날부터 매일 저녁 7시 남일당 참사현장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겠다 선언하셨고 장례가 결정되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사를 집전하셨다.
용역회사 직원들과 경찰들의 무례함과 폭력을 문정현 신부만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는 이가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아프고 억눌린 이들과 이렇게 쉽게 하나가 되어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이가 이 땅에 또 있을까? 문정현 신부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오지만 흐뭇한 미소와 함께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것이 어디 나 혼자만일까? 이 노 사제가 오래오래 지금처럼 우리 곁에서 기도하고, 밥 먹고, 잠 잘 수 있기를. 불의한 권력에 호통을 치고, 가진 자들의 오만을 꾸짖고, 막걸리 한 잔에 행복해 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시청광장을 오백번쯤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2009년의 용산, 사람의 기적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