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못 해먹어도... 골동품 요강의 화려한 변신

어항으로 변신한 백자 요강... 요강 팔자는 뒤웅박 팔자?

등록 2010.06.05 18:08수정 2010.06.05 18:0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짐짓 도자기인채 폼을 잡고 있는 요강.
짐짓 도자기인채 폼을 잡고 있는 요강.김혜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린 시절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척 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조카를 놀리기 좋아했던 장난꾸러기 고모들의 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빨강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내 다리 내놔~"

고모들이 들려준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이야기의 영향으로 나는 우리집 변소에 '달걀귀신', '처녀귀신', '몽달귀신' 등등 수도 없는 귀신이 살고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변소에서 한동안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요강이라는 기특한 물건이 없었다면 나는 매일 키를 뒤집어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요강에 밥 해먹기...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불과 30여 년 전인 80년대 초반까지도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집이 많지 않았기에 요강은 요긴하게 쓰였다. 때문에 요강을 비우고 닦는 일은 밥하는 일만큼이나 그 집안 며느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다.

놋요강을 사용하던 시절. 할머니는 며느리나 딸들에게 항상 이런 잔소리를 하셨다.


"급하면 밥을 지어 먹어도 될 정도로 정갈하게 간수하는 것이 요강이야. 가마솥은 무거워서 들고 피난을 갈 수 없으니까 가벼운 요강을 들고 가서 솥으로 쓰기도 한다는겨."
"우웩! 드러워라. 할머니. 말도 안 돼. 누가 드럽게 요강에 밥을 해먹어?"
"이누무 지지배가. 할미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너도 이담에 시집 가면 놋요강에 밥 담아 먹게끔 깨끗하게 살란 말여."
 바닥에 놓으면 영락없이 요강이지만
바닥에 놓으면 영락없이 요강이지만김혜원

요강이 얼마나 정갈하게 간수되고 있는지의 여부로 살림 잘하는 며느리를 판단하셨던 할머니. 요강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던지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일제 시대 일본군들에게 빼앗긴 놋요강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다.

"그 나쁜 놈들이 탄피 만든다고 놋그릇, 놋숟가락은 말할 것도 없고 똥오줌 받아내던 시아버지 놋요강까지 죄다 뺏어갔잖여. 그런 도적놈덜이 어디 또 있어. 내가 그때 뺏긴 놋그릇이랑 놋요강 생각만 하면 분해 죽겠어." 


일제에 놋그릇을 뺏긴 이후 놋요강을 대신하던 백자 요강. 엄마 말로는 한 손으로는 들기도 무거워 비우고 닦다 깨뜨린 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지만 그런 와중에도 달랑 하나가 친정집 창고에 남아 있었다.

가볍고 깨지지 않는 스테인레스 요강이 보급되면서 사라진 무거운 백자 요강. 하지만 딸 있는 집 엄마들은 백자 요강의 쓰임을 잘 알기에 하나 정도는 버리지 않고 어느 구석에 잘 보관해 두었다.

"백자 요강이 좌욕에는 그만이야. 백자 요강에 쑥 삶은 물을 담아 좌욕하면 잘 식지도 않고, 엉덩이가 배기지도 않고. 니들 시집가서 애기 낳고 산후조리할 때 쓰려고 간수해 뒀다."

하지만 딸들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게 되니 쪼그려 앉아야 하는 백자요강보다 훨씬 더 편한 의자식 좌훈기가 등장했다. 결국 백자 요강은 좌식 변기의 등장과 함께 먼 옛날이야기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번식력이 엄청난 구피들. 일부 새끼들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번식력이 엄청난 구피들. 일부 새끼들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김혜원

백 년 후에는 또 어떤 신분 상승을 할까

그렇게 몇십 년은 족히 친정집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백자 요강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이날 조카 녀석에게 선물한 관상어 구피들이 왕성한 번식활동 끝에 엄청난 수의 새끼를 낳아 버린 것이다. 열 마리 이하가 살기에 적당했던 작은 어항에 스무 마리가 넘는 구피들이 돌아다니다 보니 분양이 시급했다. 그때 문득 친정집 창고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백자 요강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거기다 키우면 될 것 같아.'

이미 수십 년 전 요강으로서의 기능을 마친 친정집 요강. 깨끗이 닦고 말린 요강 속에는 그 시절 만큼의 먼지만 잔뜩 담겨 있었다.

"엄마, 이거 어항으로 쓸 건데 괜찮겠지요? 혹시 그릇에 오줌기가 남아있는 건 아니겠지?"
"오줌기라니? 할머니 말처럼 먼지만 닦으면 밥 담아 먹어도 될 만큼 깨끗해. 근데 요강에 뭔 물고기를 키운다니? 아주 별짓을 다하는구나." 

그날부터 할머니의 백자 '요강'은 우리집으로 와서 백자 '어항'이 되었다. 신분의 수직상승을 이룬 것이다.

"어머, 저건 뭐야? 백자 같은데. 이거 골동품 맞지? 이조 백잔가?"
"장 항아리야? 꿀 항아리야? 예전에 우리 시골집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데...?"
"뭐? 요강? 정말이야? 하하하. 웃겨 죽겠네. 비싼 백잔줄 알았잖아."
 구피의 새집이 되어준 할머니의 요강. 한옥으로 이사한 구피들은 행복할까?
구피의 새집이 되어준 할머니의 요강. 한옥으로 이사한 구피들은 행복할까?김혜원

우리집에 온 사람들은 너나없이 백자 어항에 관심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같으면 손님들 눈에 띌까 숨기고 감추었던 것을 떡 하니 사방탁자 위에 올려두고 신주단지처럼 귀한 척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저것이 설마 요강일거라 짐작조차 하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이 사물의 용도와 가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지금은 어항으로 사용되는 할머니의 백자 요강이 앞으로 한 백 년쯤 흐른 뒤 우리 후손 누군가의 장식장에서 대단한 유물 취급을 받으며 소중하게 대접받고 있을지. TV쇼 <진품명품>에 나가서 엄청난 가치를 인정 받을지 말이다.
#백자요강 #어항 #구피 #요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 4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5. 5 이창수 "김건희 주가조작 영장 청구 없었다"...거짓말 들통 이창수 "김건희 주가조작 영장 청구 없었다"...거짓말 들통
연도별 콘텐츠 보기